맘다니 "생활비, 단순 비용 문제 아닌 '자유'의 조건"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청 앞에서 조란 맘다니 신임 뉴욕시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새해 첫날인 지난 1일(현지시간), 조란 맘다니 신임 뉴욕시장은 뉴욕시청 앞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그간 강조해왔던 주거·교통·보육비 등에 대한 정책을 언급하며 "이 정책들은 단순히 특정 비용을 무료로 만들겠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자유로 채우는 것과 관련된다"며 "오랜 시간 이 도시에서는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만 자유를 누려왔다. 이제는 바꿀 것"이라고 했다.
맘다니 시장은 미국 최대도시이자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으로 불리는 뉴욕시 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지난해 11월 출마해 당선됐다. 이민자 출신으로 처음 뉴욕시장에 당선된 그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도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최저임금 인상, 무상 버스·교육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이처럼 서민층의 생활비 부담을 적극적으로 낮추겠다는 정치 구호는 지역·인종·성별을 초월한 공감을 얻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
생활비 부담 문제를 핵심 의제로 내세운 맘다니 시장과는 달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주거, 식비, 의료비 등에 대한 가계의 지출 여력을 뜻하는 '감당 가능한 생활비(affordability)'라는 단어 자체가 "가장 큰 사기"라고 주장하며 GDP 성장 등 경제 성과를 홍보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미 CBS 뉴스가 여론조사기관 유거브와 함께 실시해 지난달 21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37%에 불과했다. 특히 물가 정책에 대한 찬성 비율이 34%로 반대 66%의 절반 수준이었다. 또 응답자의 50%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이 자신들의 재정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답했다.
높은 체감 물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계속되면서,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생활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품목을 중심으로 관세 부과 속도를 조절했다. 백악관은 지난달 31일 대통령 포고령을 통해 소파 등 일부 가구 제품과 주방 수납장, 세면대에 대한 관세 인상 발효 시점을 당초 예정됐던 올해 1월1일에서 2027년 1월1일로 1년 연기했다. 또 바로 다음 날에는 이탈리아 파스타 회사들에 반덤핑 조치를 대폭 완화하겠다고도 밝혔다. 당초 파스타 회사들에 불공정 덤핑 판매를 이유로 최대 90%에 달하는 관세가 예고됐으나, 결국 관세율이 10% 내외로 대폭 낮아졌다.
강경한 보호무역 기조 아래 '관세 폭탄'을 전면에 내세워온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전략이 생활비 부담과 물가 압박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조정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소파를 포함한 가구 등에 대한 관세 인상이 현실화할 경우 주택 리모델링 비용이 급등할 것으로 전망해왔다. 또 파스타의 경우 대미 수출품에 적용되는 기본 관세 15%에 반덤핑 관세까지 더하면 미국에서 이탈리아산 파스타의 가격은 현재의 2배로 오를 상황이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1월에도 장바구니 물가 상승 우려에 커피·바나나·코코아 등 중남미산 농산물의 관세를 대거 철폐하거나 낮추기로 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백악관이 생활비 부담과 높은 소비자 물가로 인한 정치적 압박에 직면해 관세를 조정했다"고 짚었다.
'K자형 경제'의 그늘…겉보기엔 성장, 안쪽은 균열
미국 경제에서 소득 계층별로 경제 회복의 방향이 갈라져 양극화가 심화하는 'K자형 경제' 고착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용어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 부유층과 빈곤층이 경제 회복을 다르게 경험하는 현상을 설명하며 주목받았다. 취약한 고용 시장과 지속되는 높은 물가 속에서 계층별 경제 회복이 알파벳 'K' 모양으로 격차를 벌리고 있다는 것이다.
팬데믹 당시 이 개념을 알린 경제학자 피터 애트워터는 현재 미국 경제가 "위쪽이 무거운 '젠가 탑'과 닮았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구조는 경제 데이터 간 왜곡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증시 호황 등으로 자산이 늘어난 부유층의 지출이 늘면 겉으로 보기에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큰 규모의 불안정한 하층 경제가 공존하는 상태가 된다.
지난달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최하위 소득 계층의 임금 상승률은 최상위보다 더 급격히 둔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자회사 무디스애널리틱스에 따르면 미국의 소비자 지출은 소득 상위 10% 부유층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들이 전체 소비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하위 80%가 전체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팬데믹 이전 약 42%에서 37%로 낮아졌다. 주택 등 자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보는 고소득층은 지출을 이어가고 있지만, 저소득층은 인플레이션과 고용 시장 위축으로 소비를 줄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뉴저지주의 월마트 매장에서 한 고객이 식료품을 구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이 같은 추세는 최근 미국 소비자들의 지출 행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 경제매체 CNBC는 K자형 경제의 단면을 '애피타이저 경제(Appetizer economy)'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공급망 데이터 분석 기업인 바이어스 엣지 플랫폼에 따르면 지난해 요식업계에서 메인 요리와 디저트 판매는 대체로 정체되거나 감소한 가운데, 애피타이저 주문량은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 미국 소비자들이 고가의 메인 요리 대신 저렴한 애피타이저를 더 많이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자동차 구매를 다시 생각하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고 짚었다. 딜러, 전문가, 업계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소비자들은 신차 구매에 지불할 금액에 명확한 한도를 두거나 차급 축소, 중고차 구매, 장기 자동차 대출, 할인 대기 등 절약형 소비 패턴을 보였다. 반면 자산이 늘어난 일부 고소득층은 열선 스티어링 휠, 마사지 시트,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등을 갖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및 트럭 모델에 큰돈을 쓰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부분의 소비가 고소득층에 집중되면서 미국 경제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지난 몇 년간 이들 부의 축적은 상당 부분 주식 시장 급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최근 가파르게 오른 증시가 향후 완만하게 조정되더라도 소득 상위층의 지출이 빠르게 위축돼 경기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케빈 고든 찰스슈왑 수석 투자전략가는 "주식 시장의 상승이 소비 지출을 늘릴 수 있지만, 시장이 폭락할 때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며 "만약 향후에 시장이 장기간 하락하는 국면에 접어들면 부유층의 심리가 점차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레베카 패터슨 미국외교협회(CFR) 선임 연구원도 "현재 미국의 성장은 AI 관련 자본 투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부가 창출되고 있다"면서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이 몇십개 기업에 의존하는 모습은 제대로 된 경제 리스크 관리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이승형 기자 trus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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