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러시아에는 두 종류의 북한 군인이 있다. 한 부류는 쿠르스크 등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된 전투 병력이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사자만 2000명에 달한다. 이 보고서가 다루는 건 다른 부류다. 북한 국방성과 사회안전성, 131원자력지도국 산하 부대에서 차출된 군인 신분이지만 전장 대신 러시아 공사판에 투입된 인력이다. 군복을 벗기고 학생증을 쥐여 보내는 구조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와 달리 이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4년 정상 회담을 갖고 있다. /조선DB |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는 2019년 12월까지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를 전원 송환하도록 각국에 의무화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쓸 외화를 해외 파견 인력을 통해 벌어들인다는 이유였다. 당시 러시아에만 3만명가량의 북한 노동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결의가 발효된 뒤 숫자는 급감했다. 그런데 2023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했다. 러시아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한 해에만 교육 목적으로 러시아에 입국한 북한인이 1만3221명으로, 전년(1117명)의 약 12배다.
비결은 비자 세탁이다. 노동 비자로는 보낼 수 없으니 학생·연수·기술 교류 비자로 전환한 것이다. 서류상 이들은 러시아 대학에 재학 중인 민간 유학생이다. 실제 수업 참석은 전무하다.
이들의 등록 창구 역할을 한 곳이 소제이스트비예 대학이다. 북·러 정부 간 무역경제협조위원회가 이 대학을 북한 노동자 공식 등록 기관으로 지정했다. 군인들은 이 대학 학생 신분으로 러시아에 들어온 뒤 수업은 한 번도 듣지 않고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임금은 이 대학을 통해 세탁됐다. 북한 군인을 고용한 러시아 기업들이 노동 대가를 대학 계좌로 보내면, 대학이 이를 ‘장학금’ 명목으로 북한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 대학은 2023년 10월부터 2025년 6월까지 러시아 기업 76곳에서 받은 27억루블(약 3000만달러)을 이런 식으로 지급했다. 러시아 평균 대학 장학금의 최대 66배에 달하는 액수다.
이 대학 창립자 알렉산드르 판필로프는 이미 한국 정부의 독자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북한 노동자의 불법 입국·체류를 도운 혐의다. 그런데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제재 대상 기업과 유사한 이름의 법인을 여러 개 설립해 제재 효과를 희석시키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방러 당시 세 차례 방문한 극동연방대학교도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북한의 군수 경제를 총괄하는 제2경제위원회 산하 기업 소속 인력들이 이 대학 학생 신분으로 러시아에 들어와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는 증언이 있다.
노동 조건은 가혹했다고 한다. 파견 군인들은 하루 최대 20시간 무급으로 일했다. 숙소는 컨테이너 박스였고, 씻을 물도 충분하지 않았다. 임금이 지급되더라도 최대 90%가 공제돼 개인에게는 거의 남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를 “현대판 노예제”라고 규정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
북한 군·보안 기관들은 러시아에 표면상 민간 건설회사를 세웠다. 이 위장 법인들이 군인 신분의 파견 인력을 학생으로 위장해 러시아에 들여보낸 주체다. 법인 소속으로 건설 현장에 투입된 인력이 번 돈은 법인을 통해 본국 기관에 상납금으로 올라갔다. 명목상 북한 ‘학생’들에게 지급된 돈도 실제로는 이 위장 법인을 거쳐 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현재까지 확인된 위장 법인만 108개다.
이렇게 모인 외화가 향한 곳은 핵무기 개발 기관부터 정치범 수용소, 김정은의 치적 사업까지 북한 체제 전반이었다. 노동당 군수공업부 산하 131원자력지도국이 대표적이다. 우라늄 채굴과 풍계리 핵실험장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제2경제위원회 93국도 마찬가지다. 핵무기·탄도미사일 개발과 직접 연관된 조직들이 러시아 공사판 수익으로 운영된 셈이다. 전직 파견 노동자는 보고서에 “131원자력지도국 소속으로 러시아 건설 현장에 나갔다”고 직접 증언했다.
수익은 무기 개발뿐 아니라,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는 국가보위성과 사회안전성 운영비로도 전용됐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2014년 반인도적 범죄의 가해자로 지목한 기관들이다. 김정은 통치 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연계 기관도 수익 배분에 참여했다.
내각 산하 평양건설위원회 소속 광복대외건설은 러시아에서 직접 외화를 벌어들이는 한편, 국내에서는 김정은의 최대 치적 사업인 ‘평양 5만 세대 살림집’ 건설을 맡고 있다. 러시아 공사판 수익이 김정은이 주민에게 과시하는 건설 사업 비용으로도 이어지는 셈이다. 131원자력지도국과 93국은 현재 어떤 국제 제재 대상에도 지정돼 있지 않다. 보고서는 이를 “국제 제재의 심각한 공백”이라고 지적했다.
이 구조가 작동하려면 러시아 측 협조자가 필요하다. 보고서는 70개 이상의 러시아 기업·금융·교육 기관이 연루됐다고 밝혔다.
장학금 송금 채널로 쓰인 아고라 은행의 실질 주주 올가 아베리야노바는 부친 유리 아베리야노프로부터 지분을 물려받았다. 유리 아베리야노프는 메드베데프 전 총리의 핵심 측근으로, 러시아 연방안전보장회의 전 제1부서기다. 시베리아·극동 문제를 총괄했던 인물로,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이미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북한 노동자 임금 세탁 창구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러시아 고위층 금융망과 연결된 셈이다.
일반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러시아 최대 육가공업체 체르키조보의 자회사는 2025년 초 북한 노동자 22명을 고용했다. 스타킹 제조사 오스코 프로덕트는 러시아 국방차관의 동업자가 창업한 회사로, 북한 노동자 27명을 고용했다. 두 기업 모두 유럽 기업과 거래 이력이 있어 EU 강제노동규정 위반 소지가 제기된다. EU는 강제노동이 결부된 제품의 역내 유통·수출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행 중이다.
이 자금 흐름은 우크라이나 전쟁과도 이어진다. 보고서는 두 가지 연결고리를 제시했다.
첫째는 금융망으로 , 북한 노동자 임금을 세탁한 아고라 은행의 배후 인물이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제재 대상이라는 점에서 북한 강제노동 수익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지원 세력이 같은 금융망을 공유하고 있다.
2024년 방북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
둘째는 무기다. 보고서는 러시아 건설 수익으로 조달된 자금이 북한 내 무기 공장 운영에 투입되고, 이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가 러시아에 수출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쓰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과 탄도미사일 등을 대규모로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로 확인된 상태다. 보고서는 그 생산 비용의 일부가 러시아 건설판에서 나온다는 연결 구조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러시아 내 북한 연계 법인의 설립·폐업 시기가 북한의 핵실험 주기와 맞물린다는 패턴도 짚었다. 2003~2005년 법인 설립이 집중됐고 이듬해인 2006년 1차 핵실험이 있었다. 2010~2016년 재편·증설이 이어지는 동안 핵실험이 네 차례 실시됐다. 2019~2022년에는 제재 강화와 코로나19가 겹쳐 대규모 폐업이 발생했다. 2023년 이후에는 러시아인을 명의상 소유주로 내세운 재편이 확산되고 교육 비자를 통한 파견이 다시 커지고 있다. 법인이 늘 때마다 핵실험이 따라왔다는 상관관계가 반복됐다는 게 보고서의 지적이다.
보고서 책임 조사관 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은 “노예 노동, 제재 회피, 군사 자금 조달은 국가 최고 권력 구조가 조율하는 하나의 체계”라며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가 반인도적 범죄 가해자로 지목한 북한 보안 기관들이 이 네트워크의 핵심 주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기관들은 러시아 현지에서 자체 강제 노동 부대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며 “북한의 이 국가 주도 사업만큼 인권과 안보 문제가 밀접하게 직결된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안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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