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네옴터널 해지…이라크 신도시 흐릿
현장 둔 건설사들, '확전 가능성'도 대비
"중동에서는 사업 관련 이야기를 하면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의미하는 아랍어)를 많이 듣게 됩니다. 특히 계약과 관련해 조금 딱딱한 말이 오갈 때 그렇죠. 신의 뜻대로 다 잘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중동 현장을 경험한 한 대형건설사 직원)
중동 시장이 국내 건설사에 '계륵'이 되고 있습니다. 계륵은 닭의 갈비, 다시 말해 먹을 게 별로 없지만 버리긴 아쉬운 존재를 뜻합니다. 가져도 이익은 별로 없는데 남 주기는 아까울 때도 쓰죠. 최근 전쟁과 발주처의 돌변 등 리스크가 끊이질 않는 중동 시장에 대한 건설사의 평가입니다.
중동 주요 해외 프로젝트./그래픽=비즈워치 |
중동에서 흥하고 중동으로 무너진 K-건설
아시다시피 중동은 원유가 많이 납니다. 현지에서는 이 원유를 정제할 시설을 짓기 위해 외국 건설사를 많이 찾습니다. 현지 건설업체의 기술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수처리와 메탄올, 교통시설(인프라), 신도시 조성 등의 건설 수요가 풍부한 게 중동입니다.
이런 중동은 국내 건설사에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23일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2월말까지 국내 건설업체가 61년간 해외건설 시장에서 수주한 금액은 1조494억3566만달러입니다. 이 중 중동 수주액이 5130억4121만달러입니다. 전체 수주의 48.9%죠. ▷관련기사: 다시 쌓이는 중동 일감…K-건설 '500억달러' 보인다(2025년9월19일)
아픔도 있습니다. 2009년~2011년 사이에 중동에서 확보한 일감 중 상당수가 공사비를 낮추면서까지 얻어낸 것이라 일부 건설사는 대규모 적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2015년 삼성엔지니어링이 1조1369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럼에도 국내 건설사는 중동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2020년대 들어서 국내 건설사가 중동에서 따낸 일감 규모는 지난해까지 753억4931만달러입니다. 이 기간 전체 수주액(2143억8277만달러) 중 35.1%를 차지했습니다.
현재 국내 건설사가 중동에서 진행하고 있는 주요 프로젝트는 삼성E&A의 사우디 파드힐리 가스플랜트 패키지 1·4(8조6973억원)와 아랍에미리트(UAE) 메탄올 프로젝트(2조4168억원), 현대건설의 이라크 바스라 해수처리시설공사(4조5509억원) 및 바스라 정유공장 고도화(2조6030억원), 삼성물산의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기지 탱크(3조1919억원) 등 입니다.
이 외에도 GS건설과 대우건설이 각각 사우디 파드힐리 가스플랜트 패키지2(1조6774억원), 이라크 알포 신항만 1단계(2조2652억원) 등의 공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건설사 관계자는 "사실 북미나 유럽 건설 시장에서 경쟁하기에는 현지 업체의 기술력이 뛰어난 게 사실"이라면서 "중동은 국내 건설사가 기존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어 충분히 경쟁을 해볼 수 있는 시장이고 발주량도 많은 곳이다. 수주를 계속하지 않으면 중국과 같은 경쟁국의 영향력만 키워주는 꼴"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성물산 네옴터널 공정률 변화./그래픽=비즈워치 |
대형 프로젝트는 지지부진
2022년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했을 당시 660조원에 달하는 네옴시티 관련 발주가 예상됐습니다. 이에 건설사도 제2의 중동붐을 기대했으나 막상 네옴시티 관련해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인 곳은 아직 없습니다.
특히 지난 12일 현대건설은 2022년 네옴 컴퍼니(Neom Company)와 체결한 네옴 터널 프로젝트 계약해지를 공시했습니다. 현대건설은 삼성물산을 주간사로 하고 합작법인을 세워 6613억원 규모의 해당 프로젝트를 따냈습니다. 조 단위 대형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사우디가 수백조원을 투입해 사막 위 신도시를 조성하는 '네옴'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주목받았습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2022년 7월 이 사업을 따낸 뒤 지난해 말까지 준공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부터 공정률이 더디게 올라갔습니다. 특히 지난해 3월 말 기준 해당 프로젝트의 공정률은 41%였으나 6개월이 흐른 11월 말에는 43%까지 올라가는 것에 그쳤습니다. 계약해지에 따라 삼성물산이 지난 12일 공시한 2025년 사업보고서에는 관련 내용이 아예 빠졌고요. ▷관련기사: [인사이드 스토리]위기의 중동 건설 "사우디 네옴시티 너마저…"(2025년6월23일)
현대건설 측은 "발주처의 사업 재편에 따른 계약해지 요청이 있었다"면서 "투입분에 대한 정산이 완료돼 현재까지 당사의 재무적 손실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세부 합의 조건은 계약상 비밀유지 조항에 의해 공시를 유보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형 프로젝트 수행을 기대했으나 발주처의 변덕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사례는 이라크에도 있습니다. 한화 건설부문이 2012년 이라크 비스마야 18.3㎢ 부지에 도로와 상하수도, 전력망, 10만가구의 주택 등 신도시 건립 공사를 수주했으나 발주처인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NIC)가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례입니다.
이에 한화 건설부문은 2022년 10월 NIC와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 12월 NIC가 최초 계약금액인 101억2100만달러보다 2억7700만달러를 늘린 103억9800만달러로 재계약을 요구했고 한화 건설부문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행정부로부터 최종 승인이 아직 떨어지지 않아 여전히 공사를 재개하지는 못했습니다. ▷관련기사:한화 건설부문, 이라크 비스마야 7만가구 마저 짓는다(2024년12월6일)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중동에서 사업을 할 때는 비밀유지 조항이 강하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렵다"면서 "현지 발주처와 소통하는 게 제일 고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우건설 이라크 알포 신항만 공사./사진=대우건설 |
전쟁 또 전쟁, 건설사도 피로감
지난해 6월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 당시 DL이앤씨 현지 법인 직원이 대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올해도 이란은 미국, 이스라엘과 전쟁 중입니다.
지난해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은 단기적 교전으로 12일 만에 끝났으나 올해는 이보다 더 길게 전쟁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선제타격 이후 전쟁은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이란은 카타르와 사우디, UAE 등의 정유시설까지 공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관련기사:'이란전쟁' 중동 건설은?…"수익성 악화" vs "전화위복"(3월5일)
국내 건설사가 현재 이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두고 UAE를 마주 보고 있으며 페르시아만 맞은 편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가 있습니다. 이라크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모두 국내 건설사의 주요 현장이 밀집한 곳입니다.
건설업계에서는 전쟁의 경과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확전 가능성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생산적인 대화를 했다고 밝히면서 전쟁이 곧 종식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그러나 중동에 현장을 둔 건설사의 피로감은 적지 않습니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아직 중동 현장에서 철수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확전 가능성도 지켜보며 비상회의를 계속하고 있다"면서 "다만 현재 이라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로 귀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현지에 남는 게 더 안전할 것인지도 따져봐야 할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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