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발발 이후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주요 에너지 시설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 유가는 50% 이상 급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21일 이란에 48시간 내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촉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 "가장 큰 발전소를 시작으로 이란의 각종 발전소를 공격해 초토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호르무즈 해협 지도. 로이터연합뉴스 |
WSJ는 이에 대해 에너지가 세계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에너지 등 패권 경쟁의 핵심 자원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들은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인공지능(AI) 및 미래 군사력 구축 저해 등 다양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의 약 90%를 틀어쥐고 있다. 자동차, 무기, 전자제품 등 전방위적으로 쓰이는 희토류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며 지난해 무역 협상에서 미국을 압박한 바 있다.
정치 위험 자문회사 애저 스트래티지의 앨리스 고워 파트너는 "강대국 경쟁은 이제 기본적인 문제, 즉 현대 경제와 군사력을 지탱하는 물리적 자원을 누가 통제하느냐의 문제로 돌아갔다"며 "에너지, 핵심 광물, 산업 생산 능력은 단순한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수십년간 서구의 통념은 지리가 국가의 흥망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승자는 영토나 원자재보다 자본, 기술,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을 무기화하는 국가들이 등장하며 초연결 시대가 물리적 지리를 오히려 더 강력한 무기로 만들었음을 보여줬다고 WSJ는 설명했다.
미국 외교협회 산하 지경학연구소의 에드워드 피시먼 소장은 "모든 것이 디지털이고 소프트웨어가 핵심이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여전히 지정학을 좌우하는 많은 물리적 제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우리가 목격한 가장 효과적인 경제전의 사례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이었다"며 "이란 사태를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 자립을 이뤘음에도 미국이 여전히 물리적 요충지에 좌우된다는 아이러니가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기간 내내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치며 미국 내 석유 및 가스 시추 확대를 공약하고 에너지 자립을 강조해왔다. 미국은 셰일 시추 확대에 힘입어 에너지 대규모 수입국에서 생산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원유 가격은 글로벌 시장에서 결정되는 만큼, 미국 내 생산 확대만으로는 국제 공급 충격과 가격 급등으로부터 미국을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다.
미 정부는 그간 공급망 취약성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이어왔다. 예컨대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등이 미국 내에 공장을 짓도록 유도해 아시아에서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미국 산업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다. 또 지난달에는 비상시 산업용으로 사용할 핵심 광물을 비축하기 위해 120억달러 규모의 정부 지원 펀드 '프로젝트 볼트'를 발표했다. 최근에는 중국이 지배하는 중희토류 확보를 위해 호주 광산 기업 라이너스와 예비 합의를 체결했다.
다만 미국이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콜로라도 광산대 페인 연구소의 모건 바질리안 소장은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으로 군수품 재고를 다시 축적하는 과정에서 특정 광물 수요에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WSJ는 미국이 추진하는 광물 프로젝트 상당수가 본격 가동까지 수년이 걸리는 만큼, 이 사이 미·중 갈등이 악화할 경우 공급 차질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짚었다.
자원 외에도 경쟁국들이 미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예컨대 중국은 이부프로펜 등 의약품 원료의 주요 공급국이며, 리튬 이온 배터리와 레거시 반도체 생산 점유율이 높다.
또 호르무즈 해협 같은 주요 경로를 대체하려면 광범위한 방어 체계와 새로운 파이프라인 구축에 수년이 걸린다. 핵심 광물을 확보하려면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모잠비크처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서 사업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들이 경제적 압박을 통해 미국 경제에 부담을 주고, 이러한 정책에서 후퇴하도록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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