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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피해망상' 불길 속 "가장 가공할 만한" 극우 단체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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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행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가장 가공할 만한" 극우 단체의 등장

선동가이자 "음모론의 대가"인 조셉 매카시가 1957년 사망했을 때, 냉전기 미국에서 매카시즘과 유사한 광풍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매카시가 죽은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매카시즘 시즌 2를 알리면서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 이하 JBS)라는 단체가 등장하였다. 매카시를 이어 냉전적 음모론의 생산 기지로서 "집단적 피해망상의 불길"을 되살리고자 했던 JBS의 설립자는 은퇴한 캔디 사업가 로버트 웰치였다.

그는 JBS를 세우기 이전인 1954년에 편지 형식의 에세이를 보수주의 인사들에게 보낸 바 있는데, 훗날 <정치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장문의 이 글은 1950년대 중반 반공주의 담론이 유통되는 네트워크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다. 전미제조업협회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웰치는 4년 후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호텔에서 11명의 사업가를 대상으로 이틀에 걸쳐 연설을 한 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커다랗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조직화되었고, 가장 가공할 만한" 급진적인 극우 조직 JBS를 창립했다.
프레시안

▲JBS의 창립자 로버트 웰치, 1961년 5월 15일 - 사진 출처: Erick Trickey, "Long before QAnon, Ronald Reagan and the GOP Purged John Birch Extremists from the Party," Washington Post 2021년 1월 15일, https://www.washingtonpost.com/history/2021/01/15/john-birch-society-qanon-reagan-republicans-goldwater/



반공의 강령과 음모의 정치

웰치는 도대체 왜 다소 생소한 존 버치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존 버치는 사실 JBS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미국의 침례교 선교사이자 공군정보국 소속 군인으로서 중국 공산군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극우 반공단체를 만들고자 했던 웰치가 보았을 때, 버치의 비극적인 개인사는 그를 애국주의적인 순교자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서사를 많이 담고 있었다. 버치는 미국의 사명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에 찬 젊은이였으며, 나아가 웰치가 적으로 주목하고 있던 공산 세력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던가.

존 버치를 반공주의적 순교자로 내세운 웰치의 가장 커다란 목표는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웰치는 1950년대 중반 이승만을 직접 방문했으며, 장제스를 비롯한 대만 국민당 정부의 고위 관료 등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국가의 주요 정치인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거나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처럼 글로벌한 사상 학습을 한 이후 웰치가 천명한 JBS의 강령은 그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행한 연설에 잘 드러난다.

훗날 <블루북>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 연설에서 웰치는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음모의 위협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호텔에 모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공산주의자들을 막고 그들의 음모를 궤멸시키는 것, 혹은 최소한 우리 정부에 대한 그들의 통제를 무너뜨리고 그들이 미국 안에서 지니고 있는 힘을 부수는 것"이 새롭게 탄생할 보수주의 단체의 지향점이라고 역설함으로써 JBS의 선언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핵심 주장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음모론의 전방위적 확장

그렇다면 웰치는 왜 공산주의 세력 근절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달콤한 캐러멜 캔디 사업을 했던 그가 공산주의를 향해 그토록 쓰디쓴 증오를 내뱉었을까? 이에 대해 웰치는 냉전적이고 전방위적인 음모론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민권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블루북>에서 웰치는 미국 남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은 공산주의자들이 "꼼꼼한 교활함"으로 오랫동안 공작을 편 결과이며, 순진한 미국인들을 이러한 분쟁으로 끌어들인 공산주의자들은 "니그로의 복지"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널리스트 존 N. 우드포드에 따르면, 웰치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 "니그로-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미국 "남부에서 수천 명의 백인 시민들이 살해될 것이며, 수만 명의 선량한 니그로들이 고문을 받고 죽을 것이다"라고 억측하면서, 배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산주의를 대상으로 한 황당무계하면서도 잔혹한 웰치의 음모론은 민권운동에 머물지 않았다. 정부 역시 공산주의의 음험한 마수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JBS의 통계에 의하면, 케네디 행정부 관료 및 직원의 무려 40~60%가 공산주의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이자 공화당 출신인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그들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웰치의 <정치인>에 의하면,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자유 세계의 수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반공주의 음모론의 대가인 웰치가 보기에 아이젠하워는 이 같은 임무 수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백악관 주인 자리에 앉게 된 허수아비 내지는 배신자에 불과했다.

JBS와 웰치의 의심은 행정부를 넘어 사법부를 향하기도 했다. 대상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는 위헌이라는 1954년 연방대법원 판결의 주역 얼 워렌 대법원장이었다. 웰치에게 54년 결정은 "반(反)헌법적"이며 "친(親)공산주의적"이었다. JBS는 워렌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대법원장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끊임없는 도움"을 주고 있으며, 연방대법원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정해진 절차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헌법의 빈틈을 악용하고 있다는 허황된 주장이었다.

JBS의 음모론은 미국을 넘어 유엔을 겨냥하기도 했다. 그들의 음모론적 정신세계 속에서 유엔은 공산주의자들이 제안한 것으로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항상 통제되었다. 유엔은 공산주의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셈이었다.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JBS는 수돗물에 불소(fluoride)를 첨가하는 것까지 공산주의적 음모로 몰았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불소가 미국인들을 세뇌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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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대법원장의 탄핵을 요구하는 존 버치 소사이어티 광고판, 1966년 - 사진 출처: https://exhibits.stanford.edu/fitch/catalog/bg116nt571



사이비-보수주의와 편집증적 정치

이쯤 되면 역사가 호프스태터가 JBS를 가리켜 편집증적이고 피해망상적인 보수주의라고 칭한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호프스태터의 분석에 의하면, 이들은 기껏해야 사이비-보수주의자(pseudo-conservative)로서 그들이 지닌 피해망상은 과장, 의심, 음모적 판타지를 특징으로 한다. 엄청난 음모가 자신들을 통제한다고 믿음으로써 피해망상에 빠진 그들은 일종의 "박해의 느낌"(feeling of persecution)을 공유한다. 그들은 음모라는 것은 권력을 지닌 사악한 힘들에 의해 작동하며, 따라서 이것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십자군전쟁과 같은 규모의 전면적인 싸움뿐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국가의 안전과 독립이 반역적인 플롯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에게 있어, 음모의 주인공은 외국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권력 핵심부의 주요 정치인들까지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묵시론적 이야기를 애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의 종말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 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음모론의 수용과 물적 기반

호프스태터가 주장하듯이, 사이비-보수주의자의 음모론은 정치와 사회의 "질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JBS의 비합리적이고 병리적인 주장들은 결국 울림 없는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으리라고 예측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측과는 달리 JBS의 음모론을 구매하는 독자들은 제법 있었다. 석유산업으로 엄청난 부호가 된 텍사스의 해롤드슨 헌트는 자신이 설립한 우파 성향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JBS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또한 인종분리를 지지했던 댈러스의 월리 크리스웰 목사는 JBS의 주장을 극찬하면서,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좌파와 정치인들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제7연대 지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텍사스 출신의 에드윈 워커 장군은 "프로-블루"(Pro-Blu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병사들의 투표에 개입하고 웰치가 쓴 <존 버치의 삶>과 같은 책자를 자신의 병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85년 웰치가 사망했을 당시 <뉴욕타임스>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JBS는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10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연간 예산 800만 달러에 유급 직원 270명을 둔 거대 조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JBS는 지지자를 확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출판사와 서점, 라디오 프로그램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주장이 아무리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라도, 특정 집단에게 그러한 목소리를 전파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보수주의자 버클리의 JBS 주변화 전략

하지만 조직의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JBS의 음모론적 이야기는 결국 독자와 청취자로부터 기대했던 만큼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진 못했다. 실패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JBS를 두고 전개된 보수주의 정치 세력의 주변화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1955년 <내셔널리뷰>를 창간함으로써 보수주의 운동의 지적인 구심점으로 기능하게 된 윌리엄 버클리가 이 주변화 전략을 이끌었다.

웰치는 사실 <내셔널리뷰>가 창간되던 초창기 버클리에게 적지 않은 기부를 했다. 하지만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인 배리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직을 차지하고 나아가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던 버클리는 점점 JBS의 기괴한 음모론에 정치적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61년 4월 <내셔널리뷰>에 게재한 '대소동'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버클리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잘 보여준다. 버클리는 이 칼럼에서 몇몇 언론이 "미국의 우파 전체를 저주"하기 위해 JBS의 특정 측면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화살을 언론으로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내셔널리뷰>는 공산주의적 음모가 미국 정부를 통제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JBS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버클리의 주변화 전략은 1962년 1월 플로리다 팜비치 회동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으로 전후 미국의 보수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 러셀 커크, "미스터 보수주의자" 골드워터, 그리고 버클리가 함께 한 팜비치 모임에서 JBS는 정권을 탈환하기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염원과 노력을 자칫 수포로 만들 수 있는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회동 이후 버클리는 <내셔널리뷰> 2월호에 실린 글에서 웰치의 음모론은 "끔찍한 실수"로서 반공주의라는 대의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비판의 목소리는 골드워터로부터도 나왔다. 그는 웰치가 "반공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사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JBS와 거리 두기를 감행하였다.

레이건과 JBS의 접점

레이건도 JBS의 입에 강한 재갈을 물리는 데 한몫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공산주의라는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는 웰치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JBS와 거리를 두는 데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유는 그의 반공주의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할리우드 영화배우조합에서 중책을 맡기도 했으나 결국 연방수사국에 공산주의자들의 영화계 활동에 대한 정보 제공을 약속할 만큼 레이건은 공산주의에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계에 공산주의자들의 모의와 음모가 존재한다고 믿는 레이건의 반공주의는 JBS와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에게 JBS 회원들은 애국적인 시민이었다.

하지만 레이건과 JBS 사이의 제한적인 밀월 관계는 레이건이 1966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레이건과 JBS 사이의 관계를 의문시했으며, 심지어 레이건을 두고 극단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선택"이라고 보도하였다. 레이건과 극우 세력을 함께 묶으려는 시도에 맞서 레이건 선거 캠프는 자신들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님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정부와 국가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동의했던 19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극우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는 선거에서 필패 카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현직에 있던 경쟁자 브라운 주지사도 훗날 "우리는 이처럼 정치적으로 경험도 없는 우파 극단주의자이자 늙은 배우를 1966년 선거에서 신나게 두들겨 팰 기대로 매우 흡족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레이건의 거리 두기

레이건은 결정해야만 했다. 그는 선거를 두어 달 남기고 발표한 성명에서 자신을 JBS와 엮으려는 시도가 많지만, 정작 자신은 JBS의 회원도 아니고 회원이 될 의향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레이건은 웰치의 음모론은 "매우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면서, JBS 회원들에게 웰치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론 레이건의 이러한 몇 마디 말로 웰치와 JBS의 음모론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화당 정치인들의 거리 두기 및 비판과 함께 악마의 혀가 지닌 독성은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2021년에 <서양사연구> 제65호에 게재한 논문 '미국 우파와 음모론 정치'의 2장을 수정한 것입니다. 참고문헌과 각주를 비롯해 더 상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필

[이찬행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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