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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화재 강탈에 혈안이 됐던 일제 오구라, 해방 후 유물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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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utb@gwnu.ac.kr)]
1954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패전을 맞이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던 일본인들도 귀국해야 했다. 그들에게 귀국 자체도 큰 문제였지만, 그동안 축적해 온 재산들을 남기고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또한 '조선의 전기왕'으로서 40여 년 가까이 조선에서 모은 재산은 물론이고 20년 넘게 수집했던 수많은 유물들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그는 유물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을까?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깊은 고민

일본의 패망으로 귀국을 해야만 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그동안 모아온 재산과 유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20년을 넘게 유물들을 모으면서 조선에서 '유물 수집의 권위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필자의 상상의 나래를 살짝 펼쳐 해방 이후 유물들을 놔두고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상황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그려보기로 한다.

1904년, 34살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온 오구라 다케노스케였다. 그는 대구에 정착하여 41년을 살며 일본보다 조선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냈다. 긴 세월을 조선에서 살아온 만큼 일본보다 조선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조선에서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며 '조선의 전기왕'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리고 1920년 초부터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유물이 필요하다는 일념에서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고 유물을 중심으로 도자기, 회화, 고서, 의복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을 수없이 모았다. '조선의 전기왕'이라는 말도 좋았지만, 언제부턴가 '유물 수집의 권위자'라는 말이 더 기분 좋게 들렸다.

유물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만큼 오구라 다케노스케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어느새 백발이 흩날리는 70대의 노구가 되어버렸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넓은 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석조 유물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하나둘 바라보며, 그는 넓은 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석조 유물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하나둘 바라보며, 그리고 유물을 보관한 오동나무 상자를 아쉬운 표정으로 하나둘 쓰다듬으며 유물을 모았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프레시안

▲ 대구 저택에서 유물들을 정리하며 슬퍼하는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이미지. ⓒ ChatGPT로 필자 작성.

평양의 시바타 레이조가 사지 못한 고려자기를 10만 원을 넘게 들여 사들인 일, 경주의 보통학교 교장이 도굴한 유물들을 보며 밤새도록 술을 마신 일, 5천 원에 고려자기를 판 농부를 경찰서에서 꺼내준 일, 경성 저택이 유물을 팔려는 자들로 북적인 일, 금동반가사유입상을 사지 못해 안타까워 한 일, 소중하게 보관하던 불상을 도난당한 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한 일 등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유물들을 모으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마음과 머리 속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갔다.

점점 촉박해지는 시간과 점점 초조해지는 감정은 오구라의 결단을 재촉하기만 했다. '20년 넘게 수집한 이 유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유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작은 곡옥부터 큰 석탑까지, 철제 갑옷부터 금관까지 지난날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옅은 미소와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유물들을 바라보는 슬픈 표정이 교차하며 그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했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불안이 교차하는 날들이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결단을 내리자 그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노구의 몸이 예전만큼 따라주지는 않았지만, 아직 건강한 몸은 계획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먼저 나중에 다시 대구로 돌아와서 찾아갈 유물들을 골라 회사 직원에게 포장을 시켰고 이를 1평 남짓한 지하실에 아무도 찾을 수 없게 꽁꽁 숨겨 놓았다. 그리고 지인에게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올 테니 잘 보관해 주시게'라는 부탁을 전하며 몇몇 유물들을 맡겼다. 밀항선에 실어 일본으로 가지고 가야 할 유물들도 챙겼다. 적산미술품으로 미군에서 압수당하지 않고 가져가야 할 중요한 것들을 고르고 골랐다. 가지고 갈 수 없는 유물들은 대구에 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유물들을 하나둘 정리하자 대구 저택을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이제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해야 한다. 대구에서 수십 년을 산 그였다. 그리고 대구 저택은 그에게 평범한 저택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지냈던 그의 젊은 시절과 영광스러운 날들, 그리고 값비싼 유물들이 즐비한 오구라의 인생이 함축된 저택이었다. 그는 진열실 아래 지하창고로 내려가 오동나무 덮개가 잘 닫혔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지하창고를 터벅터벅 올라와 문이 단단하게 잠겨있는지 눈에 잘 띄지 않는지도 여러 번 확인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어렵사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 때마다 넓은 마당의 여기저기에 놓인 석조 유물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무거운 석조 유물들을 트럭에 실어 대구 저택으로 가져온 일들이 떠올랐다. 석조 유물들이 그의 발걸음을 맞춰가며 하나둘씩 그의 뒤로 스쳐 지나간다.

발걸음이 늘어나는 만큼 요동치는 마음도 커진다. 이제 마당 끝에 다다랐다. 대문 앞에 선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뒤를 돌아봤다. 드넓은 마당과 이를 채우고 있는 석조 유물들, 그 뒤에 있는 넓직한 안채와 그 안의 담긴 값진 유물들... 그의 영광을 함께 한 대구와 그 저택을 떠나려 하니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마음도 발걸음도 천근만근 같았다. 조선에서 살아온 41년간의 세월, 그리고 20년 넘게 모은 유물들과 이제는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겨우 옮겨가며 자동차의 뒷좌석에 주저앉듯이 털썩 앉았다.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기 시작한다. 그의 몸은 자동차를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대구 저택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동차는 금새 대구 저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뒤로 돌려 점점 작아지는 저택을 바라봤다. 그의 아쉬운 마음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대구 저택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만 간다. 그는 체념하듯 어쩔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하며 앉았다.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려 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그렇게 대구를 떠났다.

대구 저택에 숨겨놓은 유물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해방 이후 유물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대구 저택에 숨겨놨던 유물에 관한 이야기를 확인해 보자.

1964년 5월 27일에 대구 저택에 숨겨놨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6월 중순에 관련 기사들이 보도되었다. 당시 육군 제503부대가 그의 저택 일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장실 마루 밑에서 전기공사를 하다가 여러 유물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중 유물이 어떻게 감춰져 있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경향신문>의 기사를 확인해 보자.

삼국시대의 토기를 비롯한 중국의 송, 명대 유물 및 국보급으로 취급될 자기류 등 희귀한 고대 진귀품 1백40점이 어두운 지하실 마루바닥 밑에 파묻혀 있다가 20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이 보물들은 일제 때 한국 문화재 수집가로 알려졌던 전 남전(南電)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현재 생존 중이라면 95세) 씨가 해방 직후 일본으로 귀국할 때 감춰두고 간 것으로 대구 시내 문화동에 있는 그의 옛집(현재 육군 모 부대) 마루 밑에 있는 넓이 1평 가량의 지하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직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지 못해 그 가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모두 50여 개의 오동나무 상자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이 유물들은 지난 5월 27일 상오 11시경 전기 시설을 수리하러 지하실에 들어갔던 전공 백승원(36=남산동)씨가 발견, 보고된 것이다.

이 문화재는 일본으로 귀국한 오구라씨가 그 후에 수차에 걸쳐 사람을 보내 보관 상황을 탐지해 간 일도 있고 또한 늘 잊지 못해 안타까와했다는 사실도 있다하며 일본에서도 국보급에 속하는 도자기 몇 점도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귀중한 유물들은 발견 즉시 현재 건물을 사용 중에 있는 모 부대에서 인수하여 그대로 소중히 보관 중에 있으며 중앙문화재 관리위원회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보물이 은닉되어 있던 지하실은 골동품 진열실 아래 '콘크리트'로 깊숙하게 마련되었고 그 위에 육중한 철문으로 입구가 차단되어 외부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있다.

위의 기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비록 저택을 떠나더라도 숨겨둔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도록 지하실에 유물들을 꼼꼼하게(?) 잘 숨겨놨다는 점이다. 그가 대구를 떠나고 군부대가 대구 저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이를 발견하지 못했고, 전기공사를 하다가 20여 년 만에 발견됐을 정도면 그가 얼마나 공을 들여 지하실을 만들어 놓았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다.

다음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점은 이 유물 중 일본에서 국보급인 도자기로 평가받는 유물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지 유물이 발견되기 전에 사람을 보내 그 보관 상황을 여러 차례 확인했던 점이다.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유물은 '도카도 53차 접시'(東海道五拾三次楪匙)이다. 대구 저택에서 총 23점이 발견되었는데, 19세기 초 일본의 '도카이도 53차' 풍속도가 그려진 도자기로 일본에 두 세트 밖에 남아있지 않은 일본에서 국보급에 해당하는 유물이었다.

위의 기사에서도 "수차에 걸쳐 사람을 보내 보관 상황을 탐지해 간 일도 있고 또한 늘 잊지 못해 안타까와했다는 사실도 있다"고 전하고 있고, 다른 기사에서는 "오구라씨가 죽기 전에 한 만 더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국보급 도자기류도 몇 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번 대구에서는 수많은 값진 골동품을 파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옛 주인되는 오구라란 일인이 우리 손으로 이미 발굴한 물건들 가운데 다른 한국 것은 그만 두고라도 일본 문화재 59점만은 돌려줘야 되겠다고 재일교포를 사이에 넣고 애원인지 요구인지 해 왔다고 전한다"고 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의 패전 이후 '조선의 전기왕', '유물 수집의 권위자'로 불리며 손에 넣은 재산과 유물들의 처리를 두고 상당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필자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그려 본 그의 당시 상황보다 그는 더 큰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민 끝에 보관 중인 유물의 일부를 대구 저택의 지하실에 숨겨놓고 조선을 떠났지만, 이는 20여 년 후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서 떠났다. 그가 수집한 수많은 유물들 중 대구 저택에 숨겨놨던 유물 이외의 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utb@gw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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