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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 한 뼘도 양보할 수 없다? 300년 전 한중일의 바다는 적대 아닌 교류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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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대호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필자는 최근 2주간 중국 푸젠(福建)성(이하 민남) 일대에 대한 현지 답사를 다녀왔다. 역사적으로 민남 지역은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자 다국적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오늘날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의 인적 구성 또한 대개 민남의 천주(泉州)와 장주(漳州)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하문(廈門) 구랑위(鼓浪嶼)에서 마주한 정성공(鄭成功)의 거상은 민남과 대만,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해양사의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시사한다. 이곳은 과거 대륙과 대만, 일본을 잇는 인적 이동과 표류가 빈번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답사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나가사키현 인근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발생한 중국 어선 나포 및 석방 사건(2026.02.12)은 필자에게 며칠 전 다녀온 민남 일대의 기억을 강렬하게 환기시켰다.

오늘날의 바다가 엄격한 영해선과 배타적 관할권이 작동하는 갈등의 공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수백 년 전 명청 시대의 바다를 반추하게 한다. 당시의 바다는 적대적 심문과 덕치(德治)에 기반한 환대가 공존하던, 전혀 다른 층위의 경계와 교류가 교차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명청 시대 동아시아 해역에는 표류민에 대한 비교적 안정적인 송환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중국인이 일본에 표착할 경우, 대개 나가사키로 이송된 후 도래한 중국 상선을 통해 본국으로 송환되는 해로 중심의 경로를 따랐다. 반면, 중국에 표류한 일본인의 경우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인계된 뒤 다시 일본으로 송환되는 이른바 조선 경유 경로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교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780년의 기록인 <유방필어>(遊房筆語)를 들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저명 유학자인 이토 란덴(伊東藍田)이 남경에서 출발하여 치쿠라(千倉) 에서 표류한 중국 선원들과의 필담을 엮은 것이다.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자라는 공통 문자를 매개로 호기심-경계의 해제-친밀의 단계를 거치며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이토 란덴은 불안에 떠는 표류민들에게 한시(漢詩)를 써주어 이들을 위로했고 '정'씨 성을 가진 중국 선원에게 <대학>(大學)의 첫 번째 장을 중국어 발음으로 소리 내어 읽어달라고 부탁하여 직접 그 음을 경청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들은 이별의 순간에는 국경을 초월한 지적 우정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위의 내용은 표류민을 잠재적 위협이 아닌 문화적 손님으로 환대했던 적대가 아닌 교감의 사례이자, 쇄국 상황에서도 유교적 공통 문법을 통해 동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가 작동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표류민 송환 과정은 쇄국 체제 하의 동아시아 각국에 있어 중요한 대외 정보 수집의 통로로 기능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청나라 상인과의 문답, 표류민 심문, 서적 수입 등을 통해 체계적인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훈춘(琿春)에서 북경에 이르는 교통로, 청나라의 관직 및 군사 제도 등 구체적인 지리·정치 정보를 파악하고자 했다. 즉, 표류민 관련 기록들은 명청대 중일 관계의 비공식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교류의 일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해양은 배타적 영토 주권과 자원 패권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분쟁의 현장이다. 바다는 단순한 영토의 연장을 넘어 막대한 자원의 보고(寶庫)로 인식되기에, 망망대해의 작은 일점(一點)조차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배타적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

앞으로 한동안 지속되어 경색될 중일 관계 속에서, <유방필어>(遊房筆語)가 보여준 포용과 소통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과거 한중일 3국이 표류민을 단순한 경계와 감시의 대상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소통과 교류의 매개로 승화시켰던 지혜는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존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근대적 국경선이 확립된 작금의 현실에서 전근대적 느슨함을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를 단순히 자원 쟁탈의 전장으로만 규정한다면, 동아시아의 미래는 제로섬 게임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사람'(人)과 '문'(文)을 먼저 보았던 선인들의 유연한 사고야말로, 꽉 막힌 외교의 혈로를 뚫고 진정한 공영(共榮)의 바다로 나아가는 유일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

▲ 푸젠(福建)성 하문 정성공 거대상. ⓒ조대호



[ 조대호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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