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 첫 국정연설에서 예상대로 자화자찬만 늘어놓으면서 새 관세 정책의 힘을 부각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20일(현지 시간) 상호관세를 위법으로 판단했지만, 대다수 국가가 기존 무역 합의를 유지하길 원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글로벌 금융시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을 벗어나는 돌발 정책을 내놓지 않자 일단은 안정을 찾은 분위기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24일부터 발효한 10%의 글로벌 관세를 일부 국가를 대상으로만 15%로 인상하겠다고 암시한 점은 변수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미국 행정부가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자국 기업 탄압으로 해석하면서 무역 관행 조사에 들어간 점이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재집권 첫 국정연설...“관세 더 강력해지고 더 나쁜 합의 가능”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1시간 48분 동안 2기 집권 첫 국정연설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이 자리에서 대법원의 상호관세 위법 판결을 거론하며 “매우 유감스러운 판결이지만 거의 모든 국가와 기업이 그들이 이미 체결한 합의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으로서 가진 법적 권한을 고려하면 새로운 합의를 하는 게 그들에게 훨씬 더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들은 대법원의 유감스러운 개입 이전에 협상한 것과 같은 성공적인 길을 따라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를 대체할 관세 수단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 강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나라들이 내는 관세가 과거처럼 지금의 소득세 제도를 상당히 대체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대법원은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해 세계 각국에 부과한 관세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법 122조에 근거한 글로벌 관세 10%를 24일 0시 1분 부로 발효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아가 이튿날인 2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 관세율을 15%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관세 조사를 시작한다고도 알렸다. 무역법 301조는 외국 정부의 부당하거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행동 등에 맞서 행정부에 관세를 부과할 권한을 주는 조항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아울러 대형 배터리·주철 및 철제 부품·플라스틱 배관·산업용 화학 물질·전력망·통신장비 등 6개 산업 분야를 대상으로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신규 품목 관세를 부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요컨대 무역법 122조를 근거로 최장 150일간 최고 10~15%의 글로벌 관세를 부과한 뒤, 그 사이 무역법 301조에 따른 후속 관세와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품목 관세 조사를 마치고 관세 공백을 지우겠다는 구상이다. IEEPA를 활용해 관세를 부과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이었지만 무역법 301조와 무역확장법 232조로 관세를 부과한 역대 지도자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등 여러 명이다.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한 철강 품목 관세의 경우는 트럼프 대통령 1기 때도 행정부가 법원에서 승소한 적이 있다.
“美 경제 황금시대” 자화자찬...4월 방중, 북한, 가상화폐는 언급 안 해
국정연설은 과거 ‘연두교서’로 불렸으며, 헌법에 근거한 행사다. 대통령이 의회에 국가의 상태와 주요 현안을 설명하고 한 해 동안 우선 추진할 입법 과제와 대내외 정책 방향을 알리는 자리다. 임기 2년 차에 하는 국정연설은 중간선거가 있는 해에 하기에 통상 대외 현안보다는 자국 내 관심사를 주로 다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20일 재집권 뒤 같은 해 3월 4일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연설한 바 있지만, 정식 국정연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대에 머물 만큼 저조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공화당 내부에서는 오는 11월 3일 중간선거에서 연방 하원 다수당 지위를 민주당에 내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도 만약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할 경우 조기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미국은 이번 중간선거에서 연방 하원 435석 전체, 상원 100석 중 34석, 주지사 50석 중 36석을 새로 뽑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이날도 자신의 경제 치적을 스스로 칭찬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전 대통령이 물려준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불법 이민, 범죄 등의 문제를 1년 만에 해결했음을 부각하면서 “누구도 본 적 없는 변혁과 역사적 대전환을 이뤘다”고 자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개월 동안 우리 정부는 근원 인플레이션을 5년여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며 “지난해 마지막 3개월 동안은 1.7%까지 떨어졌다”고 자랑했다. 이어 “지금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더 나아지고, 더 부유해지고, 더 강해진 황금 시대”라며 “오늘날 우리의 국경은 안전하고, 우리의 정신은 되살아났고, 인플레이션은 크게 꺾였고, 소득은 빠르게 상승했으며, 호황의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의 적들은 두려워하고 있다”고 열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 정책과 관련해서는 3월 31일∼4월 2일 중국 방문 계획이나 북한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대선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던 가상화폐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대신 이란에 대해서는 핵무기 개발 중단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력도 사용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합의를 타결하기를 원하지만 아직 ‘핵무기를 결코 보유하지 않겠다’는 비밀 발언(secret words)을 듣지 못했다”며 “나는 가능할 때마다 평화를 추구하겠지만, 필요할 경우에는 미국을 겨냥한 위협에 맞서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문제 외에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 마약 카르텔에 대한 외국 테러 조직 지정, 해상 마약 유입 차단, 멕시코 카르텔 수장 제거 등을 언급하며 “우리는 서반구에서 미국의 안보와 우위를 회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미네소타주에 많이 거주하는 소말리아계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미국 납세자들에게 약 190억 달러(약 27조 원)를 약탈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건도 다루는 대법관들은 정중히 맞아...USTR “15% 관세는 일부 국가 대상”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108분간 연설을 진행해 2000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세운 기존 국정연설 최장 기록인 1시간 28분 49초를 20분이나 경신했다. 무엇보다 관세 등 경제 정책과 이민 정책을 두고 현 기조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이대로 중간선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메인 등 민주당이 우세인 주(州)를 열거하면서 “비록 4개월 전에 시작됐지만, 나는 위대한 부통령이 주도할 ‘사기와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고 밝혔다. 또 불법 이민 단속을 주도하는 국토안보부(DHS)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상태에 빠진 상황에 대해서도 “예산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복원을 요구한다”고 역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이번 행사에서 최근 며칠 동안 “바보들” “나라의 망신” 등으로 조롱했던 대법관들을 직접 만나 이목을 끌기도 했다. 판결 직후 기자회견 때만 해도 “솔직히 오든 말든 상관없다”고 비꼬던 태도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비교적 대법관들을 정중하게 맞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에 위법 판단을 내린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엘레나 케이건,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과도 모두 악수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대법원과 완전히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했다고 평가했다. 대법원은 현재 출생권 시민권 보장 폐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 해임, 독립 행정기구 규제 당국자 해임 등 트럼프 대통령의 시도에 대한 판결을 줄줄이 앞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과정에서 “민주당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미쳤다”며 야당을 노골적으로 비방하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대법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 남자 아이스하키팀을 소개할 때만 함께 기립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법적 근거가 더 탄탄한 관세 정책을 강행할 의지를 보인 가운데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현재 발효된 글로벌 관세에 관해 다소 다른 얘기를 전했다. 그리어 대표는 25일 폭스비즈니스에 출연해 “우리는 현재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일부 국가(some)에 대해서는 15%로 올리고 다른 국가들을 향해서는 더 높일 수 있다”고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봐온 관세 유형과 일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어 대표의 말은 글로벌 관세도 나라별로 차등해서 부과하겠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는 “전 세계(Worldwide)에 15% 관세를 적용할 것”이라던 트럼프 대통령 발언과는 결이 다른 내용이기도 했다. 나아가 글로벌 관세 기한 150일이 지나도 무역법 301조를 통해 국가별로 관세율을 달리 매기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어 대표는 지난 22일 ABC 방송에서도 301조 조사와 관련해 “브라질과 중국에 대해 조사를 개시했다”면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과잉 생산 능력에 대한 조사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쿠팡 사태’ 韓에 무역법 조사 유력...기존 협정 이행 여부 따라 세율 차등할 수도
한국의 경우는 추가 관세와 관련해 쿠팡 사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앞서 쿠팡의 미국 모회사인 쿠팡Inc 투자사 그린옥스와 알티미터는 지난달 22일 한국이 범정부 차원에서 회사를 공격하고 있다며 USTR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직접 조사를 요청했다. 외교가에서는 USTR이 이들의 요청에 따라 301조 관련 조사를 개시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관측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경화 주미대사는 24일 워싱턴DC 한국문화원에서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갖고 “트럼프 행정부의 후속조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대미 협의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조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만 말했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이 새 관세를 예고한 상태에서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 대표는 이달 23일 미국 연방 하원에 출석해 장시간 비공개 증언을 했다. 로저스 대표는 증언을 마친 뒤 ‘위원회가 어떤 질의를 했느냐’ ‘어떻게 답변했느냐’ ‘위원회의 주된 우려 사항은 무엇이었냐’ 등 한국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답변을 하지 않은 채 하원 건물을 빠져나갔다. 로저스 대표는 현재 정보유출 규모 축소, 증거 인멸, 국회 청문회 위증, 산업재해 은폐 등 여러 혐의로 한국의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2차 관세 전쟁에 금융 시장은 일단 안정을 찾은 모양새다. 23일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에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나스닥종합지수 등 뉴욕 3대 지수가 모두 1% 이상 하락했으나 24일과 25일에는 다시 1% 안팎으로 일제히 반등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정책보다는 과거 업적 위주로 국정연설을 구성하면서 실시간으로 장이 열린 아시아 증시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코스피지수는 트럼프 대통령 국정연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5일 사상 첫 6000선을 넘어섰다.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도 같은 날 5만 8000선을 재돌파하며 장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시장이 상호관세 무력화에 따른 충격은 일단 어느 정도 흡수했지만, 당분간은 트럼프 행정부의 새 정책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무역 합의에 얼마나 이행 의지를 보이는가에 따라 글로벌 관세와 무역법 301조 근거 관세 세율이 차등 적용될 수 있는 까닭이다. 한국의 경우는 쿠팡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과 국회의 이른바 온라인 플랫폼법(온플법) 도입 여부도 관세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뉴욕=윤경환 특파원 ykh22@sedaily.com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