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과잉 심화와 원가 경쟁력 약화, 고부가 제품 부족 등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석유화학 산업이 본격적인 재편 단계에 들어갔다. 정부가 롯데케미칼 대산 나프타분해설비(NCC) 110만t 가동중단을 골자로 한 '석유화학산업 사업재편 1호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금융·세제·원가·인허가 개선을 묶은 2조1000억원 이상 규모의 종합 패키지를 가동하기로 했다. 지난해 발표한 구조개편 로드맵 이후 첫 실행 사례다.
산업통상부는 25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롯데케미칼이 제출한 사업재편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조치를 "개별 기업의 사후적 구조조정이 아니라 산업 전반의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는 선제적·자발적 재편의 첫 사례"라고 규정했다.
110만t 선별 감축…'양' 아닌 '경쟁력' 중심 재편
이번 1호 프로젝트의 핵심은 단순 감산이 아니다. 롯데케미칼 대산 사업장을 분할해 현대케미칼과 합병, 통합법인을 설립하고 NCC 110만t 설비 1기를 3년간 가동 중단한다. 대산산단 내 에틸렌 생산능력은 195만t에서 85만t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남은 설비의 가동률을 기존 80% 수준에서 100%까지 끌어올려 고정비 부담을 낮추고 단가 경쟁력을 회복하겠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얼마를 줄였느냐'보다 '어떤 설비를 줄였느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구조개편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경쟁력"이라며 "효율이 낮은 설비를 줄이고 효율이 높은 설비로 전환해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가동을 멈추는 설비가 롯데 측 NCC인 배경에 대해서도 "프로젝트 단위로 중복 설비와 효율성을 평가한 결과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낮은 설비를 중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운스트림 설비 감축은 범용·적자 품목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다만 제품 수급 상황이 유동적인 만큼 구체적인 물량과 설비는 이행 과정에서 확정될 예정이다. 업계가 자율적으로 제시해온 270만~370만t 감축 목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부는 "해당 수치는 정부 목표가 아니며 단순 합산식 접근은 적절치 않다"고 선을 그었다.
통합법인은 단순 구조조정이 아닌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전선·케이블용 고탄성 경량소재, 이차전지 전해액용 유기용매 등 고부가 제품 비중을 확대하고, 바이오 나프타와 에탄 도입을 통해 탄소배출을 최대 50% 낮추는 친환경 전환도 병행한다. 정유·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통해 원료 조달과 생산·판매를 통합 운영하면서 운영 효율성도 높일 계획이다.
1.2조 자구노력에 2조 매칭…정책금융이 '완충 장치'
이번 구조개편 모델의 또 다른 특징은 기업 자구노력에 정책금융을 매칭한 구조다.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은 각각 6000억원씩 총 1조2000억원을 증자한다. 이에 맞춰 채권단은 신규자금 최대 1조원, 기존 대출의 영구채 전환 최대 1조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기존 협약채무 약 7조9000억원에 대한 상환유예와 금융조건 유지까지 포함하면 금융 안정장치는 최대 9조9000억원 규모로 설명된다.
정부는 이를 "기업과 채권단이 함께 베팅하는 구조"라고 표현했다. 자구노력과 사업계획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해 지원 규모를 정하는 방식으로, 일시적 유동성 지원을 넘어 구조 전환의 시간을 확보해주는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자구노력이 크면 지원도 확대될 수 있고, 반대의 경우 축소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세제와 원가 지원도 포함됐다. 취득세·등록면허세 75~100% 감면, 법인세 과세이연 확대, 이월결손금 공제한도 상향 등이 적용된다. 대산을 분산에너지특구로 지정해 전기요금을 한국전력 대비 4~5% 인하하고, 열(스팀) 중복공급 규제를 완화한다. 연료용 액화천연가스(LNG) 직도입 범위 확대와 나프타·원유 무관세 적용 연장도 병행된다. 원가 절감 효과는 3년 기준 690억~1150억원으로 추산된다.
다만 전기요금 인하 폭을 둘러싼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기업들이 요구한 수준과 특구 적용 인하 폭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에 정부는 계시별 요금제, 지역별 차등요금제 등 추가 제도 도입 가능성을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철강 등 타 업종과의 형평성 문제도 함께 논의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관계장관회의에서 참석, 발언하고 있다. 2026.2.25 조용준 기자 |
2·3호 재편 '급물살'
이번 1호 승인으로 후속 구조개편안 추진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지난해 말 산업부에 제출된 사업재편안은 총 5건으로, 이번에 승인된 대산 1호를 제외하면 4개 안이 세부안 제출을 앞두고 있다. 여수산단에서는 여천NCC가 세부안을 준비 중이며, LG화학과 GS칼텍스의 합작 가능성도 거론된다. 울산에서는 SK지오센트릭·대한유화·에쓰오일 등이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업계는 정부 지원 구조가 구체화되면서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보고 있다. 상환 유예와 금융조건 유지, 자본 확충을 병행한 지원 구조는 재무 부담이 큰 기업들에 '완충 장치'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구조개편 세부안이 잇따라 제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석화산업 위기의 근본 원인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글로벌 수요 부진과 중국발 대규모 증설에 따른 공급 과잉이 지속될 경우 재무 구조 개선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고부가 전환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일회성 처방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은 "민간의 자구노력과 정부의 실효성 있는 지원이 함께 가야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며 "이번 승인이 구조개편 확산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대산 1호 프로젝트는 정부와 업계가 협력해 도출한 첫 실행 성과"라며 "후속 사업재편도 속도감 있게 추진해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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