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도 고온에도 견디는 신축성 소재 개발
몸에 착 붙는 '스티커 컴퓨터' 시대로 한걸음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사람의 팔에 부착된 투명하고 신축성 있는 '전자 피부' 반도체의 모습. 원래 길이의 3배까지 늘어나도 성능을 유지하며, 오른쪽 하단의 실험 장면처럼 섭씨 300도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혁신적인 내구성을 보여준다. (그래픽=제미나이 생성) |
[파이낸셜뉴스] 이화여자대학교 화공신소재공학과 이병훈 교수팀은 아주대학교,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 연구팀과 함께 마치 고무줄처럼 3배 넘게 쭉쭉 늘려도 전기가 쌩쌩 잘 통하는 혁신적인 반도체 소재를 개발했다. 이 소재는 뜨거운 열에도 강하고 찢어지지 않아, 우리 피부에 스티커처럼 붙이는 컴퓨터나 부드러운 로봇을 만드는 핵심 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쭉쭉 늘어나는 전자 피부의 시대
이번 연구 성과는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던 '전자 피부'를 현실로 한 발짝 더 끌어당겼다. 지금까지의 반도체는 딱딱하거나, 조금만 늘려도 전기 통로가 끊어져 성능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개발된 소재는 원래 길이보다 300% 이상 늘려도 전기적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10cm짜리 소재를 40cm가 될 때까지 잡아당겨도 성능 저하가 전혀 없는 셈이다.
이 기술은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피부에 직접 붙여 실시간으로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의료용 패치는 물론, 딱딱한 금속 대신 부드러운 소재로 움직이는 '소프트 로봇'의 신경망을 만드는 데도 필수적이다. 특히 열에 강한 특성 덕분에 일상생활의 뜨거운 환경에서도 오작동 없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레고 블록처럼 정밀하게 쌓은 '분자 설계'
연구팀은 이 놀라운 결과를 얻기 위해 '다중블록 공중합체'라는 특별한 구조를 설계했다. 전기를 잘 전달하는 '단단한 블록(P3HT)'과 고무처럼 신축성이 좋은 '말랑한 블록(PDMS)'을 분자 단위에서 촘촘하게 연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리빙 중합(Living Polymerization)' 기법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쌓아 올리듯 분자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연구팀은 이 기법을 통해 두 성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조절함으로써, 소재를 극한으로 늘렸을 때도 전기 통로가 비틀리거나 끊어지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300도의 불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성능
실험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소재를 300% 늘려도 표면에 미세한 균열조차 발생하지 않았으며, 전기가 흐르는 효율인 '전하 이동도' 역시 늘어나기 전과 똑같은 100점 만점의 성적을 유지했다.
또한, 보통의 유연 소재가 100도만 넘어도 녹아버리는 것과 달리, 이 소재는 무려 섭씨 300도의 고온 열처리 후에도 반도체 특성을 잃지 않았다. 이는 튀김 기름보다 훨씬 뜨거운 온도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 뜻으로, 복잡한 반도체 제조 공정도 거뜬히 견딜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번 연구 성과는 화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앙게반테 케미(Angewandte Chemie)'에 게재되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언박싱은 여기까지다. 딱딱한 반도체가 부드러운 고무처럼 변신해 우리 몸의 일부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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