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브뤼셀·런던=연합뉴스) 현윤경 김지연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란 공격을 위한 군기지 사용을 놓고 충돌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미국의 공격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유럽연합(EU)도 회원국인 스페인에 지지를 표했다.
산체스 총리는 4일(현지시간) 방송으로 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이란 정권에 반대한다면서도 "불법에 더한 불법으로 응할 순 없다. 인류 대재앙이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이 보도했다.
산체스 총리는 "스페인 정부의 입장은 '전쟁 반대'(No a la guerra)라는 네 자로 요약할 수 있다"며 "정부란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문제 해결을 제공해야지 국민 삶을 악화하는 게 아니기에 우리는 이 재앙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도 언급하면서 "큰 전쟁은 오판과 기술적 결함,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통제 불능에 빠지는 일련의 대응에서 시작되곤 한다.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수백만의 운명을 걸고 러시안룰렛(극단적인 도박)을 할 순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3일 백악관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스페인을 향해 '스페인은 끔찍하다', '무역을 중단하겠다', '금수 조치를 할 권한이 있다' 등 공세를 퍼부었다. 산체스 정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과정에서 미군이 카디스의 해군기지와 세비야의 공군기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산체스 총리는 "단지 누군가의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로 우리의 가치와 이익에 반하는, 세상에 나쁜 일에 공모하지는 않겠다"며 "스페인의 대응은 순진한 게 아니라 일관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장기화할 수 있고 전 세계에 심각한 경제적 영향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유럽의 이민 위기, 테러 증가, 에너지 가격 급등, 경제 위기라는 장기적 피해를 가져왔다고도 지적했다.
산체스 총리는 "일부가 늘 그랬듯이 자기네 실패를 감추는 데 전쟁 연막을 쓰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대국민 연설하는 산체스 총리 |
EU 집행위원회는 4일 성명을 내고 "모든 회원국, 회원국 시민과 전적으로 연대할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공동의 무역 정책을 통해 EU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스페인이 EU의 일원인 만큼 미국이 EU와 별개로 스페인과 무역 관계를 끊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올로프 길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EU와 미국은 작년 중요한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면서 "집행위원회는 미국이 약속한 내용을 완전히 이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강조했다.
이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호혜적인 대서양 양안의 무역 관계를 모두의 이익을 위해 계속 지지할 것"이라며 "특히 국제적인 혼돈의 시기에는 이러한 관계를 지키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명백히 양측 모두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중도좌파 산체스 총리는 유럽에서 대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어온 지도자다. 산체스 정부는 가자지구 전쟁 관련 정책,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국방비 증액, 대중국 정책 등에서 미국에 맞서는 정책과 발언을 이어 왔다.
특히 산체스 총리가 전쟁 초기부터 "미국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며 이란 공습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산체스 총리가 국내에서 정치적 압박을 받는 가운데 좌파 세력을 결집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보복으로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관측도 동시에 나온다.
CIS연구소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 77%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BBC 방송은 보수 유권자조차 이 문제에 대해선 산체스 총리를 지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외교 정책 전문가 마이클 월시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스페인의 군기지 사용 거부는 미국의 주요 군사 작전 중에 글로벌 위상을 깎아내린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나토 동맹국, 비동맹국에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면 스페인이 완벽한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ykhyun14@yna.co.kr,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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