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K팝 문법’으로 전통 재해석… 대한민국 서사 풀어내다 [심층기획-BTS, K팝 새 이정표]

댓글0
아리랑 품고 세계 퍼진 'K헤리티지' <끝>
단순 접목 넘어 역사적 의미 되새겨
고유 유산 재발견… 세계 경쟁력 입증
아이돌 팬덤 K역사·문화 탐구 심취
스타들 국보급 유물 해설사로 등장
국립중앙박물관 ‘힙한 성지’ 변모
“한국적인 것, K팝 트렌드 자리 잡아”
경복궁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어도(御道), 이른바 ‘왕의 길’을 따라 방탄소년단(BTS) 일곱 멤버가 걸어 나오는 장면은 세계 190개국 시청자들이 숨죽여 기다린 세기의 장면이 될 터였다. 변방에서 온 K팝 스타가 세계 무대에 우뚝 서 조선의 왕이 걷던 그 길을 당당히 밟는 모습은 K팝이 마침내 역사의 중심에 섰음을 온 세계에 선언하는 일이라는 기대였다.

21일 열린 ‘BTS 더 컴백 라이브 | 아리랑’에서 BTS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대신 드론이 왕의 길을 훑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은 화면을 통해 600여년 전 왕의 시선으로 그 길을 걸었다. 생각보다 단출한 연출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BTS가 왕의 길 대신 광화문 앞에 서는 것을 택한 것은 역사에 대한 존중이었다.

세계일보

18일(현지시간) 방탄소년단(BTS)의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표를 앞두고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리지 상공에서 BTS의 컴백을 기념하는 드론쇼가 진행되고 있다. 빅히트뮤직 제공


국가유산청 궁능문화유산분과위원회와 하이브 측은 공연 허가 논의 과정에서 조선의 왕만이 밟을 수 있었던 길을 자신들이 걷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위원회 심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24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BTS는 어떤 장소를 유명하게 만드는 그룹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메타포를 형성하는 그룹이다. 왜 그 길을 걷지 않았는가를 묻게 만드는 것”이라며 “왕처럼 그 길을 걸어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과장하는 게 아닐까라고 판단한 것 같다. 대신 그 장소를 배경으로 하면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K팝이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화려한 장식으로 전통을 덧입히던 단계를 넘어 역사적 맥락과 의미까지 껴안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서구 문법을 표준으로 삼던 세계 대중문화 무대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문화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

세계일보

지난달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열린 블랙핑크 새 앨범 ‘데드라인(DEADLINE)’ 사전 청음 행사에서 팬들이 신곡을 들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통을 입은 K팝… BTS·블랙핑크가 연 K헤리티지 시대

K팝과 전통문화의 결합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BTS는 2018년 사물놀이와 탈춤이 가미된 ‘아이돌(IDOL)’로 ‘얼씨구’, ‘지화자 좋다’ 같은 우리말 ‘떼창’을 세계 무대에 울려 퍼지게 했고, 멤버 슈가는 ‘대취타’에서 조선시대 군례악을 힙합 비트와 결합해 전통을 음악 서사의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미 CNN방송은 이번 BTS 컴백을 두고 “젊은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화유산을 재발견하고 취향에 맞게 재정의하는 시기에 이루어진 일종의 문화적 귀환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블랙핑크도 K헤리티지 확산 흐름에 힘을 보탰다. 지난달 새 앨범 출시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과 진행한 대규모 협업에서 관람객은 국보급 유물 해설을 블랙핑크 멤버들의 목소리(한국어·영어·태국어)로 들을 수 있었다. 정적인 유물과 동적인 K팝 스타의 결합이 박물관을 전 세계 팬들이 향유하는 역동적인 성지로 바꿔 놓고 있다는 평가다. 2023년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보여준 기와지붕 세트와 한복 의상은 CNN방송이 “한국 유산에 대한 경의”라고 조명할 만큼 한국적 미학의 정점을 찍었다. 제니는 솔로 앨범에서 신라 장신구를 걸치고 화랑의 전신인 원화(源花)로 변신하는 등 K팝 스타들의 전통 재해석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일보

세계일보

K헤리티지의 물결은 K팝 음악을 넘어 콘텐츠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K팝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지난 16일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관왕에 올랐다. 판소리 가락으로 시작된 축하 공연은 사물놀이 악사들의 한국 무용으로 이어졌고, 할리우드 스타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오스카를 K팝 공연장으로 바꿔 놓았다. 주제가상을 수상한 이재는 대한제국 황실 대례복에서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입고 트로피를 받아들었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와 미학이 세계 최고 권위의 무대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이병민 건국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최근 ‘케데헌’과 BTS 컴백 등 최근 일련의 장면들은 문화산업의 무게 중심이 한국으로 옮겨왔음을 보여준다”며 “핵심은 스토리다. 마블이 슈퍼히어로 서사로 시대의 관객과 공명했듯, BTS가 시대의 감각을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K팝 서사가 헤리티지로 향한다

이처럼 K팝에서 한국적 정서는 더 이상 장식이 아니라 음악과 서사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아이돌의 세계관을 해석하고 공유하는 데 익숙한 팬덤이 이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같은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BTS 팬이 아리랑의 역사를 되짚어보거나, 제니의 무대에서 신라 금관을 발견하고 박물관을 찾는 식이다.

특히 BTS는 이번 컴백에서 ‘아리랑’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 서사에 차용, 앨범 출시를 거대한 문화적 이벤트로 전환시켰다. 1896년 미국 워싱턴 하워드대에서 조선 유학생 7명이 축음기에 남긴 세계 최초의 아리랑 음원에서 모티브를 얻은 애니메이션 트레일러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존된 해당 음반과 BTS의 무대가 겹치면서, 미 포브스는 “130년 세월을 넘어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노래와 선율은 살아남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한국인의 회복력과 정체성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아리랑이 정본 없이 누구나 가사를 더하고 빼며 부르는 열린 구조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듯, BTS가 ‘아리랑’을 택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얹을 수 있는 열린 서사를 K팝의 문법으로 풀어낸 선택이었다.

세계일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감각전시실에서 한 관람객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와 진동을 체험하는 모습.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와 맥놀이는 BTS 신규 앨범 수록곡 ‘No.29’에 활용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음악 안에도 서사는 촘촘히 박혀 있다.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국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2분간 이어지는 6번 트랙 ‘No.29’도 마찬가지다. 771년 신라 때 주조돼 1200년을 건너온 범종의 울림이 K팝 음원이 된 것이다. 이훈 한양대 교수(관광학)는 “예전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 한류 때는 세트장과 장소들이 부각됐다면 BTS는 스토리와 메시지를 가진 그룹”이라며 “장소의 표면적 표현성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내면성과 역사성까지 비치면서 한국의 문화유산이 무엇인지, 왜 아리랑인지를 전 세계 팬들이 자연스럽게 묻고 탐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도 “우리 전통을 알리기 위해 홍보물을 만드는 것보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스타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줄 때 그 효과와 파급력은 훨씬 크다”고 말했다. K팝이 서구 시장의 승인을 기다리던 변방의 장르에서 스스로 세계 트렌드를 만드는 주체로 올라선 만큼, 한국적인 것을 세련되게 재해석하는 능력이 K팝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광화문 공연에 대해 “광화문과 대한민국 홍보에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며 “안전 문제를 잘 챙겨서 사고 없이 잘 됐다”고 호평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이 선택한 뉴스

  • 뉴시스'관광 100선'으로 기억하는 광복…문체부, 독립기념관·대구서문시장 등 소개
  • 스포츠월드2NE1 박봄, 건강 회복 후 ‘손흥민 고별전’ 무대 찢었다
  • 아시아경제쓰레기도 미래 유산…매립지에서 물질문화의 의미 찾는다
  • 머니투데이"일상에서 느끼는 호텔 품격"…롯데호텔, 욕실 어메니티 출시
  • 이데일리미디어아트로 만나는 국가유산…전국 8개 도시 개최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