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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용서 안 했는데…” 아파트 침입 속옷 절취 피해 여성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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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감형·형식적 공탁에 집행유예 선고
피해자, 사법부 솜방망이 처벌의 허점 지적
“가해자는 일상 유지, 피해자만 삶 터전 잃어”
조선일보

20대 피해 여성이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하며 참담한 심경을 담은 호소문. /권광순 기자


새벽 시간, 경북 안동의 한 아파트 3층 베란다를 넘어 20대 여성들이 사는 집에 세 차례나 침입해 속옷을 훔친 30대 남성에게 1심 법원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갓 사회에 발을 내디뎠던 20대 피해 여성은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과 가해자 중심의 재판 결과를 강하게 비판하며 참담한 심경을 담은 호소문을 공개했다.

◇무너진 ‘나이팅게일’의 꿈… 일상이 된 공포

피해자 B(29)씨는 2021년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안동의 한 병원에 첫발을 내디뎠다. 고된 3교대 근무 속에서도 최고의 간호사가 되겠다는 자부심으로 동료 후배와 함께 전세 아파트에서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27일, 같은 아파트 바로 뒷동에 거주하던 A(38)씨가 새벽 시간 B씨의 집 베란다 창문을 넘어 침입하면서 평범했던 일상은 산산조각 났다. 냄새를 맡는 등 엽기적 행동에 속옷만 골라 훔쳐 달아난 A씨의 범행. 이후 B씨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결국 직장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었다. B씨는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고, 밤마다 침대 밑까지 확인해야만 겨우 잠들 수 있다”며 끝없는 공포와 불안을 호소했다.

◇“만취라니”… 납득할 수 없는 양형

최근 대구지법 안동지원은 스토킹처벌법 위반과 주거침입, 주거수색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을 인정하고 공탁을 한 점,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받은 점, 범행 당시 기억을 못 할 정도로 만취 상태였던 점을 양형 사유로 들었다.

하지만 B씨는 재판부의 ‘만취 상태’ 판단을 강하게 반박했다. B씨는 “가해자는 낙상 위험을 피해 3층 베란다로 신속히 침입했고, 거실에 널브러진 옷가지도 피해 다닐 정도로 의식이 정상이었다”며 경찰에 제출된 CCTV 영상과 상반되는 재판부의 판단에 분통을 터뜨렸다.

◇“합의금 아닌 진정한 사과 원해”

피해자를 더욱 좌절하게 만든 것은 가해자의 기만적인 태도와 사법부의 소극적인 피해자 보호 조치다. A씨는 구속영장 실질심사 당시 피해자와의 격리를 위해 이사를 가고 직장도 그만두겠다고 약속했으나, 현재까지도 범행 장소에서 불과 40m 떨어진 곳에 거주하며 버젓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법원이 양형 사유로 삼은 ‘공탁금’에 대해서도 B씨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들에게 각각 250만원씩 공탁한 뒤, 합의 의사가 없자 재판 전 전화를 걸어 “공탁금을 더 걸 테니 할부가 가능하냐”고 물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B씨는 “제가 원하는 건 합의금이 아니라 피의자의 분명한 사과였다. 진정성 있는 손 편지라도 보내왔다면 용서했을 것”이라며 “사과 한마디 없이 법원에만 반성문을 내는 가해자를, 제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법이 용서하느냐”고 반문했다.

끝으로 B씨는 주거침입이 누군가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중한 범죄임을 강조하며 사법 제도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감정적 보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겪은 고통이 사회와 법 앞에서 분명하게 인정되기를 바란다”며 “저희만 그저 재수가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속상하다. 앞으로는 피해자의 고통과 목소리가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호소문을 맺었다.

조선일보

지난해 6월 13일 오후 속옷 절도 사건을 당한 피해자 B씨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 내 범인이 사는 동을 가르키고 있다. B씨는 범인이 이웃 주민이라는 사실에 직장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이사했다. /권광순 기자


<호소문>

2025년 5월 27일 경북 안동에서 발생한 주거침입·속옷 절도 사건의 피해 여성입니다.

저는 2021년 4년제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그해 첫 직장으로 안동의 한 병원을 다녔습니다. 낮밤 3교대 등 고된 일이 연속이었지만 최고의 ‘나이팅게일’이 되겠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객지 생활을 극복하고 생활비도 아낄 겸 같은 병원 후배와 전세 아파트에서 수다를 떨며 사회 새내기로서 나름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최근 대구지법 안동지원에서 결심 공판을 지켜본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과 참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이후 저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범인의 얼굴과 신상을 알 수 없는 가해자 중심의 현실이 더 불안했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두려움에 연속이었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는 날이 일상이 됐습니다. 평범했던 저의 삶은 무너졌고,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아직도 밤마다 침대 밑이나 집안 곳곳을 확인하고서야 잠자리를 들 정도로 불안한 마음은 일상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지켜본 저의 심정은 안도감이 아니라 좌절감뿐이었습니다. 가해자에게 내려진 가벼운 처벌이 과연 피해자가 겪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무너진 시간의 무게도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피해자가 감당해야 했던 두려움과 고통에 비해 재판 결과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고, 그 사실이 무엇보다 저를 참담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일부에선 그깟 속옷 몇 장 잃은 것인데 ‘다치지도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고 위로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삶을 원래대로 돌려놓기엔 부족했습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건 발생 후 당시 가해자 스스로 이사를 가고, 직장도 외지로 옮긴다고 해서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참작 사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범인은 그곳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고 직장도 그대로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허탈함과 분노마저 느낍니다.

피해자의 불안과 안전은 얼마나 고려되었는지 재판부에 묻고 싶습니다. 재판부가 피의자가 범행 당시 기억을 못 할 정도로 만취 상태인 점을 양형 사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자칫 낙상 사고의 위험을 피해 신속하게 아파트 3층 베란다로 침입했습니다. 저희가 경찰에 제출한 영상을 보더라도 거실에 널브러진 옷가지도 요리조리 피해 다닐 정도로 의식이 정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공탁금을 걸었다는 점도 양형 이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가해자는 250만원씩, 피해자들에게 총 500만원의 공탁금을 걸었더군요. 합의 의사가 없자 재판 전 피의자 측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공탁금을 더 걸테니 할부가 가능하냐고. 무슨 가전제품 할부도 아니고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합의금이 아니라 피의자의 분명한 사과였습니다. 진정성 있는 손 편지라도 보내왔으면 아마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는 저에겐 사과 한마디 없이 법원에만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여전히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법은 과연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인가요? 제가 용서 안 했는데 왜 법이 먼저 용서합니까? 재판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며 우리 사회와 법 제도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큰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 고통과 삶의 붕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볍게 평가되는 것은 아닌지, 피해자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반영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주거 침입은 누군가의 삶의 기반과 가장 기본적인 안전감조차 무너뜨리는 중한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느끼는 법의 잣대는 피해자가 체감하는 고통의 무게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처벌만이 대수가 아닌 누군가에 대한 감정적인 보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피해자가 겪은 공포와 고통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이 사회와 법 앞에서 분명하게 인정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혹시 피해자분 법정에 나왔나요?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정으로 사과하세요.” 외국의 어느 판사의 재판처럼 이런 모습을 기대한 제가 무리한 상상일까요.

1심 재판이 끝났어도 피해자의 시간은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안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본적인 권리인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권리가 위협받았을 때 피해자가 얼마나 쉽게 보호받지 못할 수 있는지도 똑똑히 느꼈습니다. 저희들만 그저 재수가 없었던 걸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속상합니다.

부디 이번 사건으로 주거 안전과 피해자 보호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바램입니다. 앞으로는 피해자의 고통과 목소리가 보다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안동=권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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