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6월 7일자 8면. |
1983년 6월 11일자 9면. |
1985년 8월 22일자 9면. |
“한국 아마야구는 박동희(19·고려대 1년)의 오른쪽 어깨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올해 부산고를 졸업, 고려대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박동희는 국제 대회에서 7전 전승을 기록,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왔다.”(1986년 11월 5일 자 9면)
1986년 11월 5일자 9면. |
대학 3학년 때 시속 156㎞ 공을 던져 선동열을 능가하는 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아마야구 최고의 투수 박동희(21·고려대 3년)의 볼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중략) 본격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말 한 프로팀 관계자가 박동희의 볼을 스피드건으로 체크한 결과 최고 시속 156㎞가 나왔다. 이는 프로 최고의 강속구 투수인 선동열이 전성기 때 마크했던 154㎞보다 앞선 것이다.”(1988년 5월 12일 자 10면)
1988년 5월 12일자 10면. |
부산이 연고인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는 박동희의 합류로 전력이 급상승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런데 돌연 박동희가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간다는 보도가 나왔다. 롯데 측이 스카우트 협상에서 “롯데 외에는 다른 팀에는 갈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해보라”고 고압적 태도를 보여 기분이 상했다는 말이 나왔다. 기사에서 박동희는 “부산 야구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롯데에서 뛰고 싶었으나 가족 등 주위에서 미국의 프로 진출을 강력히 권유해 마음을 굳혔다”(1989년 12월 19일 자 15면)고 말했다.
1989년 12월 19일자 15면. |
해외 진출은 성사되지 못했다. 박동희는 1990년 결국 롯데에 입단했다. 계약금 1억5200만원으로 선동열을 뛰어넘는 역대 최고 액수였다.
박동희는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며 MVP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최동원·선동열을 잇는 ‘최고 투수’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동열 이후 ‘한국 최고’라는 명예로운 왕관을 이어받을 만한 투수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한 시즌에 반짝했던 선수들은 많았지만 ‘최고’라는 명예가 주어지기엔 ‘함량 미달’이었다는 평가. 한때 기대를 모았던 박동희(롯데)는 빠른 공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컨트롤 난조에 위기 관리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고…”(1996년 3월 15일 자 18면)
2007년 3월 23일자 A31면. |
은퇴 5년 후인 2007년 3월 22일 오전 3시 15분쯤 부산 광안동 도로에서 승용차를 몰고 가다 버스 승강장 기둥을 들이받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39세였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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