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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치매 막는 ‘기적의 K-방울’…바로 나[이설의 한입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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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삼키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식재료의 탄생과 변화, 맛에 얽힌 기억과 감정들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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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회사법인내포에서 생들기름을 추출하는 모습. 저온에서 압착한 생들기름은 혈류 개선과 치매 예방에 좋은 오메가3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나야, 들기름.”
요리 대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 열풍이 거셌던 지난해. 최강록 셰프가 들기름에 졸인 무 요리를 내놓았다. 덩그러니 놓인 무를 맛본 심사위원들 얼굴에 천천히 ‘진실의 미간’이 잡혔다. 이를 계기로 많은 이가 들기름을 ‘단독으로’ 다시 보게 됐다. 반찬이나 요리를 거드는 조연이 아닌, 들기름 본연의 향과 맛이 호기심을 자아낸 것이다.

참기름과 올리브유는 존재감이 뚜렷하다. 각각 고소함과 트렌디함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들기름은 이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약한 편이다. 향은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들기름 막국수’ 유행 전에는 시그니처 요리도 없었다.

이런 들기름의 가치가 최근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프리미엄 생(生)들기름 전문 브랜드가 급증했고 관련 밀키트가 다수 출시됐다. 들깨를 활용한 디저트 메뉴도 생겼다. 해외에서는 올리브유를 대체할 슈퍼푸드이자 트러플 오일을 능가하는 향미로 미슐랭 셰프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영국 미식 잡지 ‘레스토랑’은 지난해 “트러플이나 아르간 오일을 대체할 이국적 고소함이 뉴욕과 런던의 파인다이닝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푸드 트렌드 매체들은 “들기름은 식물성 오메가3의 정점이자 안티에이징의 비밀병기”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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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식량과학원에 따르면 들기름용 들깨 씨앗 품종은 35종에 이른다. 내포 제공


‘들기름 문화’ 만든 한민족

“성질이 따듯하고 독이 없으며 정수를 채워주고 간을 윤택하게 한다.”(동의보감)
“진이(들기름)에 달달 볶아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그 맛이 매우 고소하고 깊다.”(음식디미방)

들깨는 들깻잎(참깻잎과 다름)이 지면서 영그는 열매다.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고산지대와 중국 서남부로 알려졌지만, 그 가치를 알아본 건 한민족이었다. 정훈백 코메가 대표는 “들깨에서 기름을 짜내 먹는 건 한민족이 유일했다. 들기름은 우리 민족이 지닌 석유와 같다”고 했다.

과거 기름을 얻는 방법은 고행에 가까웠다.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내 깨를 담은 뒤 몸무게를 쐐기에 실어 누르며 기름을 짜냈다. 이른바 쐐기기름틀 방식이다. 1960~1970년대 전반에 기계식 압착기가 등장한 뒤로 방앗간 시대가 열렸다. 산업화 시기, 방앗간에서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동네 분위기를 데웠다.

1980년대 식탁이 산업화되면서 들기름도 브랜드 시대를 맞았다. 1983년 오뚜기는 ‘고소한 참기름’으로 성공을 거둔 뒤 들기름 제품도 출시했다.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도 투명한 병에 담긴 들기름 제품을 선보였다. 초기 ‘방앗간 기름이 진짜’라는 벽에 부딪혔지만 1990년대 대형 마트가 확산되면서 대중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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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쿠앤즈버킷’에서 관광객들이 들기름, 참기름 제품 들을 둘러보고 있다. 이설 기자 snow@donga.ocm


유럽 일본 동남아 관광객들 “맛있어요”

“정말 다르네요. 일본 기름과 완전히 달라요. 기름 짜는 모습을 볼 수 있나요?”

13일 서울 중구 ‘쿠앤즈버킷’ 사옥. 주택가에 자리한 독특한 외관의 건물에 일본 홍콩 대만 덴마크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나고 들었다. 이곳 박정용 대표가 건넨 들기름을 맛본 일본 관광객들은 “정말 너무 다르다. 완전 다른 맛”이라며 신나게 ‘기름 쇼핑’을 했다.

참기름, 들기름, 들깨가루, 참깨 화장품, 참깨 캐러멜…. 이곳의 인기 상품은 저온에서 압착한 들기름과 참기름이다. 박 대표는 “예전엔 참기름 인지도가 높았지만 최근엔 들기름과 참기름을 찾는 비율이 반반 정도 된다. 들기름을 찾는 수요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했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한층을 꽉 채우는 복잡한 설비가 고소한 향기 뿜어 내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방앗간과 작은 공장을 합친 듯한 묘한 공간이었다.

쿠앤즈버킷은 40도 저온에서 바로 기름을 짜낸다. 냉압착 방식 생들기름이다. 180도 이상 고온에서 볶아 기계로 짜내는 전통 들기름과는 맛도 색도 다르다. 연노란빛 도는 들기름을 두 입 맛보니 견과류와 버터 향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아침마다 올리브유 대신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일명 ‘마트 들기름’을 거쳐 10여 년 전부터는 프리미엄 들기름 시장이 형성됐다. 소량으로 생산하는 생들기름이 주력 상품이다. 전통 들기름은 고온에서 깨를 볶아 고소함이 극대화되지만 영양소가 일부 파괴된다. 생들기름은 오메가3 효능을 온전히 보존하고 산패(酸敗) 진행도 느리다.

2000년대 중반 생들기름을 처음 만든 정훈백 대표는 “한 일본인 식물학자가 들깨를 ‘금덩어리’라 부르는 것에 충격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며 “너무 익숙해서 간과했던 들기름의 영양 가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생들기름”이라고 했다. 들깨 100g당 오메가3(알파-리놀렌산·ALA) 함유량은 약 63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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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쿠앤즈버킷’ 사옥 2, 3층에서는 직접 기름을 만든다. 들기름은 저온과 냉압착 방식 2종류 제품이 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스페셜티 들기름’ 꿈꿔

부드러운 맛, 고소한 맛, 묵직한 맛…. 들기름 생산자들은 생들기름 시장 ‘시즌2’를 꿈꾼다. 커피나 올리브유처럼 세분화된 미식 영역으로 진화하겠다는 포부다. 지금도 미각이 예민한 셰프들은 풀 향, 견과류 향처럼 선호하는 들기름이 따로 있다고 한다.

박형 농업회사법인내포 대표는 “토종 들깨는 품종마다 향, 맛, 색이 모두 다르고 같은 품종이라도 가공 방식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박정용 대표는 “커피 애호가의 다양한 기호가 커피 스페셜티를 이끌고 스페셜티가 다시 기호를 창출했듯, 기름 시장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생들기름에 주력하는 브랜드는 온라인 판매 기준으로 100여 개 정도다. 코메가, 쿠앤즈버킷처럼 규모가 큰 곳도 있지만, 중소 규모 로컬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각 브랜드는 생산자 또는 공간의 개성을 입고 성장 중이다.

내포는 지난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 미각대회에서 ‘매헌 고소한 들기름’으로 3스타 등급을 받았다. 강원 원주시 ‘옥희방앗간’은 방앗간과 카페 그리고 체험을 결합한 컨셉트로 지역 명소가 됐다. ‘지리산처럼’ ‘병아리방앗간’ 같은 로컬 브랜드는 산지 스토리를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들기름을 활용한 요리를 선보이는 셰프도 늘고 있다. 미쓰고 이무라 일본 셰프는 “들깨 씨앗, 가루, 기름은 각각 향이 퍼지는 타이밍이 다르다. 향의 시간차를 고려해 들기름을 요리에 응용한다”고 했다. 들기름 막국수, 들깨 비빔면, 들기름 소바 등 들기름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독자적 요리 분야로 정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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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시 깨 로스터리 ‘옥희방앗간’의 모나카 들깨 아이스크림. 카페와 방앗간을 결합한 공간으로 깨 로스팅 체체험도 할 수 있다. 옥희방앗간 제공


‘땅의 기운’ 담은 오메가3 덩어리

“들기름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와 견줘 손색없는 깊이를 가졌다. 이것을 ‘한국의 액체 다이아몬드’라 부르고 싶다.”(이탈리아 셰프 파브리치오 페라리)

“들기름은 씨앗 추출 기름 중 가장 ‘땅의 기운’을 잘 담고 있다. 채식 식단에서 들기름은 단백질 소화를 돕고 맛을 풍부하게 하는 최고의 식재료다.”(튀르키예 셰프 무사 다그데비렌)

세계 들기름 시장은 지난해 13억8000만 달러(약 2조693억 원) 규모에서 2034년 48억5000만 달러(약 7조2735억 원)로 커질 전망이다. 향이 은은하고 영양성분이 우수해 해외 시장을 뚫기 유리하다는 평가다.

기존에는 수출 90%가 일본에 편중됐다면 최근 10년 사이 미국 대만 동남아 시장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이정준 경기수출 이사는 “한식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최근 동남아 지역 수출이 늘고 있다. 채식을 많이 하고 건강에 관심이 높은 국가 중심으로 관심이 뜨겁다”고 했다.

들기름은 건강 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압도적인 오메가3 함량 때문이다. 들기름에는 오메가3 60~65%, 오메가6 15~20%, 오메가9 15%가량이 들어 있다. 올리브유는 오메가9이 70~80%를 차지하고 오메가3 함유량은 1% 정도다.

김정인 국립식량과학원 농업연구사는 “오메가3 지방산인 알파-리놀렌산은 체내에서 일부가 EPA와 DHA로 전환돼 심혈관 건강에 이롭다. 염증 억제, 항산화,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들기름 종주국은 한국이지만 영양성분을 부각해 ‘기적의 오일’로 조명한 것은 일본이었다. 초고령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은 일찍이 고령자 건강에 관심이 높았다. 2014년 오메가3가 뇌 신경세포를 깨운다는 연구가 널리 알려지면서 ‘에고마유(えごま油·들기름) 열풍’이 불었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지중해 식단으로 공복에 올리브유를 먹는 식습관이 유행한 것처럼 들기름도 건강식품으로 최근 유행의 흐름에 올라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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