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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 세계는 오늘도 보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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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엘하이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독일의 과오가 미국서도 나타날 것이라 예견
악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에 잠재하고 있어
아시아경제

영화 뉘른베르크의 공식 예고편 중 헤르만 괴링(러셀 크로우, 왼쪽)과 더글러스 켈리(레이 말렉)이 마주보는 장면. 뉘른베르크 공식트레일러 캡쳐.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 기업을 다룬다. 프랑스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조합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프랑스 기업은 노조를 탄압한다. 노동권을 중시하는 국가 출신임에도 그렇다. 이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하는 문장은 이렇다.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잭 엘하이의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을 앞둔 나치 지도부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 기록이다.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수뇌부를 관리하며 재판에 설 수 있도록 평정심을 유지하게 했던 정신과 의사이자 군의관 더글러스 맥글래션 켈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켈리는 나치 지도자들을 만나기 전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그들에게서 공통된 결함, 즉 악행을 서슴지 않는 성향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했다. 나치라는 ‘병증’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유럽이 폐허가 되고 수백만 명이 죽었으며 현대 문명이 거의 파괴된 이 참상이, 이런 혼란을 초래한 힘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이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나치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악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켈리가 마주한 괴링은 단순한 ‘악인’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떠돌이 개와 고양이를 보호하는 법안에는 힘을 보탰지만, 동시에 피로 물든 숙청을 주도했고 적법 절차 없이 반대자를 처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공언했다. 다른 생명에는 연민을 보이면서도 동족에게는 잔혹함을 드러냈다.

나치 지도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순수한 의미의 악인이나 ‘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기준과 타인에 대한 공감을 이토록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괴링의 사례는 능력과 지위를 갖춘 사람이라도 방향 감각을 잃으면 누구든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 끝에 그는 더욱 불편한 결론에 이른다. 나치 지도자들이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고 이를 묵인하게 만든 자질은 특정 집단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평범한 사람들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에서의 경험은 독일의 문제가 미국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웠다.

당시 미국 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없고, 문명이 그 정도의 야만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며, 민주주의 전통이 전체주의를 막아줄 것이라 믿었다. 켈리는 이런 낙관이 순진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늘날 미국에는 나치와 유사한 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막아줄 장치가 거의 없다"고 경고했다.

이 우려는 수십 년이 흐른 뒤 현실의 한 장면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마두로를 체포했고, 이스라엘과 함께 대이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지만, 전쟁의 목적을 명확히 설명하는 이는 드물다. 한때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가해자로 비치는 상황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켈리의 연구가 던지는 결론은 분명하다. 악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특정한 계기가 생기면 누구나 악이 될 수 있다. 그가 관찰한 나치 지도자들 역시 정신병자가 아니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평범한 사람도 조건이 갖춰지면 나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결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닮았다. 악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 속에 잠재해 있다. 세상을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인류를 지도 위의 숫자로만 바라보는 순간, 우리 안의 악은 언제든 현실이 된다. 조건은 이미 충분하다.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잭 엘하이 지음 | 채재용 옮김 | 히포크라테스 | 335쪽 |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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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형 기자 gh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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