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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때]바다 아래 핵, 책상 위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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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식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
선체보다 먼저 떠오르는 협정문·조직도·예산표
반세기 숙원을 막아온 건 바다보다 바깥의 시간
아시아경제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잠수함만이 아니다. 어떤 국가는 그 아래로 두려움과 결심을 함께 밀어 넣는다.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을 읽고 남는 것은 강철 선체의 형상보다, 그 선체를 끝내 만들어내려는 국가의 표정이다. 책은 잠수함을 설명하지만, 실은 잠수함보다 더 큰 것을 비춘다. 청와대와 국방부, 조선소와 원자로, 한미 원자력협정과 IAEA, 예산과 조직도 같은 것들. 물속 무기를 다룬 책인데도 자꾸 책상 위 풍경이 따라 나온다.

책의 첫 걸음은 물속으로 향하지만, 곧 시선은 물 위로 올라온다. 디젤 잠수함의 짧은 숨, AIP의 애매한 보완, 핵추진 잠수함의 긴 잠항.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북한이 얽힌 주변 해역이 뒤따라 붙고, 해상교통로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말이 그 위에 포개진다. 북한의 SLBM 위협, 해상교통로 보호와 전략적 자율성의 필요까지, 선체와 원자로를 다루는 장면보다 협정문과 사업단, 관리 체계가 더 오래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잠수함은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이고, 의지의 문제이며, 끝내는 국가가 얼마나 오래 한 방향을 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논지는 거의 숨을 돌리지 않고 뻗어 나간다. 이런 직선의 문장은 때로 거칠다. 그러나 이 거침이야말로 문근식이라는 저자가 이 문제를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가까이에 두고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이 책에는 균형 잡힌 척 물러서는 태도보다, 오래 참아온 사람이 마침내 말을 꺼낼 때의 밀도가 있다. 그 힘은 저자의 이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책 곳곳에는 잠수함이라는 물건을 오래 만져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깔려 있다. 장보고함 인수 과정, 나대용함 함장, 362사업단 경험 같은 이력은 책 뒤쪽에 붙는 약력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장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바닥처럼 느껴진다. 안보를 다룬 책들은 대개 단어가 먼저 부풀어 오른다. 억제, 대응, 자율성, 균형 같은 말이 커질수록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문장에는 그 말들이 비교적 쉽게 허공으로 뜨지 않는다. 선체의 무게와 작전의 시간, 해역의 깊이와 국제 규범의 마찰 같은 것이 그 아래 받치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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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KSS-III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된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 개념도. 책은 이 선체보다, 이를 가능하게 할 국가의 결심을 더 오래 응시한다. 사진 H.I. 서튼 X.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잠수함의 우수성을 말하면서도 자꾸 잠수함 바깥의 이야기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잠수함의 역사와 추진 원리, 디젤과 핵추진의 차이, 전장 환경의 변화를 짚는다. 그러나 책이 진짜 속도를 얻는 지점은 그 다음부터다. 한국형 사업은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독자 건조는 가능한가, 왜 과거에는 좌절했는가, 한미 원자력협정과 국제 규제의 문턱은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왜 대통령 직속 PMO가 필요한가. 이쯤 되면 잠수함은 더 이상 바다 속 병기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시험하는 하나의 질문이 된다. 국가가 장기 프로젝트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 부처와 기술과 외교를 한 방향으로 묶을 수 있는가, 정권이 바뀌어도 사업의 숨이 끊기지 않게 만들 수 있는가. 책은 거듭 그쪽을 본다.

그래서 이 책은 무기 해설서라기보다 국가를 설득하는 문서에 가깝다. 설계도와 정책 메모, 회고와 제안서가 한 권 안에서 겹쳐진다. 특히 대통령 직속 범정부 통합 사업단 구상은 그 흐름 위에 놓인 가장 노골적인 문장이다. 이 제안은 단순한 조직도 하나를 보태는 차원이 아니다. 국방부와 해군만으로는 안 되고, 외교와 국방, 원자력과 산업, 예산과 국제 신뢰를 한꺼번에 다뤄야 한다. 바다 밑의 선체를 말하면서 실은 지상 위 행정의 구조와 정치의 지속성을 묻는 쪽에 더 가깝다. 한국 사회에서 큰 사업이 기술의 부족보다 조정의 실패로 흔들린 적이 드물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책의 시선은 과장이라기보다 오래된 현실 감각에 가깝게 읽힌다. 잠수함 한 척의 성능보다, 그 한 척을 끝까지 밀어 올릴 수 있는 국가의 체력이 더 자주 문제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용과 역내 긴장, 외교적 반발과 다른 선택지의 문제는 길지 않다. 그 빈자리까지 포함해 문장은 한 방향을 오래 본다. 반세기 동안 접혔다 펴지기를 되풀이한 시간이 이번에도 육지에 붙들려 있을 수는 없다는 쪽이다. 수심 아래의 어둠보다 자꾸 협정문과 조직도, 예산표와 회의실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선체는 아직 바다에 없는데, 책은 벌써 그 바깥의 시간을 재고 있다.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 | 문근식 저 | 플래닛미디어 | 352쪽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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