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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계 ‘맥시멀리스트’, 알고 보면 ‘휴머니스트’…왜 지금 말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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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말러 공연만 20여개
임헌정과 부천필이 말러 시초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말러 붐’
정보량 넘쳐 정서적 포만감 느껴
헤럴드경제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부활’ [KBS교향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트럼펫은 ‘비극의 전령사’였다. 단 3화음의 셋잇단음표가 불안과 죽음을 실은 장중한 팡파르로 떠돌았다. ‘장송행진곡’은 굴곡 많은 인간의 나약함과 그 상흔을 딛고 일어서는 숭고한 영웅적 면모를 끄집어냈다. 3악장의 총 819마디 내내 쉬지 않고 숨을 불어넣어야 하는 호른의 사투는 비극과 환희를 잇는 거대한 전환점이자 가교였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호른 수석 케이티 울리는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부드러우면서 밀도가 높아 ‘리퀴드 골드’라고 불리는 울리의 호른은 어둠에서 생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고 담백하게 그렸다. 기교를 넘어서는 깊이의 서사였다. 클래식 음악계의 대표 맥시멀리스트인 말러의 교향곡은 ‘지휘 거장’ 정명훈의 손길을 타고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우아함과 할리우드 영화의 스펙터클을 동시에 품었다. 세계적인 지휘자와 슈퍼스타 용병, KBS교향악단의 아름다운 조화를 끌어냈다.

다시 ‘말러의 시작’이다. 2026년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지형도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된다. 바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다. 말러는 옳았다.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언은 2026년 대한민국 음악계에서도 어김없이 증명됐다.

‘클래식계 공용어’ 된 말러…시초는 임헌정, 붐은 정명훈
올해에만 무려 20여개. 이제 말러는 과거의 ‘특별한 도전’이 아닌 일상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클래식계의 공용어’가 됐다.

올 초 임헌정 지휘자의 말러로 포문을 연 ‘대전’은 정명훈 지휘자의 ‘5번’(3월 13일)으로 3월을 알렸다. ‘말러의 봄’은 오는 19~20일엔 얍 판 츠베덴 감독이 지휘하는 6번 ‘비극적’으로 이어진다. 같은 곡은 오엘 레비 지휘로 5월 28일 KBS교향악단이 다시 해석한다.

황장원 음악평론가는 “이제 말러를 연주하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며 “청중의 수요가 넘치고, 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으니 연주를 더 많이 (무대에) 올리게 된다”고 봤다.

사실 말러가 국내 교향악단의 ‘단골’ 프로그램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말러의 기원’ 격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헌정 지휘자가 이끈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말러 시리즈’(1999~2003)가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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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의전당 제공]



음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비주류나 다름없던 부천필하모닉이 말러 교향곡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은 한국 음악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시도로 한국 청중에게 말러라는 작곡가가 각인됐다. 오케스트라엔 예술적 성취를, 청중에겐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제시한 시도였다.

정명훈 음악감독은 ‘말러 붐’의 주역이다. 2000년대 중반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끈 정 감독은 당시 세계적 수준의 연주 역량을 바탕으로 ‘말러 사이클’을 진행했다. 전문가들은 이때를 “한국 클래식 시장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본다. 그는 전에도 라디오 프랑스와도 말러를 연주한 명실상부 말러 전문가였다.

정 감독이 2012년부터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역사상 최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몸담게 된 것도 말러의 곡을 악단에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정통 독일파로 유대인인 말러의 곡을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러를 지휘하기 위해 지휘자가 됐다”는 정 감독의 고백은 국내에서도 ‘말러리안(Mahlerian)’의 탄생을 알리며 탄탄한 말러 팬덤을 구축했다.

‘말러 시대’가 열린 것은 엔데믹이 오면서였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는 동안 거리두기로 공연장을 띄어 앉기를 하고 오케스트라는 소편성 교향곡 위주로 무대에 섰다. 특히 침방울 확산의 우려로 팬데믹 시절 가장 취약한 악기군이었던 금관 파트는 사라지기 일쑤였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팬데믹 동안 대편성 곡들을 연주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과 반발 작용으로 말러와 쇼스타코비치의 대편성 곡들이 많이 무대에 올랐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말러는 오랜 시간 국내 악단에게 까다로운 대상이었다. 긴 연주 시간, 복잡한 음악 구조, 100인조나 되는 대편성과 희귀 악기의 사용은 오케스트라는 물론 청중에게도 넘기 힘든 산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전문가들은 국내 오케스트라의 ‘질적 진화’로 말러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음악으로 보고 있다.

황장원 평론가는 세대교체와 더불어 오케스트라의 성장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그는 “해외 유학을 통해 말러를 일상적으로 접했던 20~40대 젊은 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이 국내 악단의 주축이 되면서 변화가 일었다”며 “젊은 연주자로의 세대교체, 유학 시절의 경험, 연주 노하우의 축적과 맞물러 말러 사이클을 특별한 도전이 아닌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봤다. 이제 프로 악단에 말러 사이클은 통과 의례이자 성인식이며, 말러를 거르는 것은 ‘직무 유기’라는 생각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 역시 “예전에는 말러의 음악이 규모가 크고 연주 시간이 길어서 잘 연주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국 오케스트라 역시 그 정도의 체급을 갖췄고, 말러를 경험한 지휘자들도 많아진 것도 말러가 자주 연주되는 이유”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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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부활’ [KBS교향악단 제공]



도전을 넘어 해석으로…정명훈은 감동 서사, 츠베덴은 에너지
이제 말러를 연주하는 것은 ‘도전’이 아닌 ‘해석’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황 평론가는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는 제대로 성공하긴 어려워도 연주자와 청중 모두가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대단하다”며 “물론 악단마다 편차는 있지만 도전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봤다. 대원문화재단 전문 위원인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악단의 입장에서 말러를 버거워하는 느낌이 없다. 더 이상 말러에 도전하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두지 않는다”고 했다.

교향곡 5번으로 2026년 ‘말러의 문’을 연 정 감독과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더 특별했다. 화려한 ‘객원 수석’으로 음악의 밀도와 응집력을 높였고, 말러 연주를 위한 기술적 노하우의 집적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케이티 올리 호른 수석, 트럼본에 장 필립 나브레즈는 깊고 따뜻한 유럽 정통의 금관 사운드를 이식했고, KBS교향악단의 남관모 수석은 이들과 함께 흔들림 없는 트럼펫으로 ‘말러’의 품격을 높였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악장 마티아스 볼룽까지 합세해 정 감독의 세밀한 해석을 뒷받침하자, 현악 분야의 응집력이 살아났다. 대편성 곡임에도 각 악기의 솔로 역량이 실내악처럼 정교하게 맞물려야 하는 5번을 연주하기에 탁월한 전략이었다.

황 평론가는 “정명훈 감독의 지휘는 거시적인 안목과 훌륭한 기교는 물론이고, 말러의 음악 안에 담긴 작품의 감정적 파고를 극대화한다”며 “전체의 흐름과 감동적인 측면이 부각돼 연주가 끝날 때쯤엔 굉장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평했다. 류 평론가는 “말러 교향곡 안의 여러 가지 요소를 본인만의 음악관으로 만들어낸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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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여명을 잇는 ‘가교’로 불리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퍼블릭 도메인 제공]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기 시작하며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은 ‘말러 사이클’을 천명했다. 벌써 1, 2번 교향곡의 녹음을 마쳤고, 3월엔 6번 ‘비극적’ 연주를 앞두고 있다. 이 곡은 작곡 당시 ‘다성음악의 미로 속에 빠진 불협화음’, ‘허풍 떨고 비대하며 소란스럽기만 한 무의미함’이라는 비난과 혹평이 쏟아진 교향곡이다.

황 평론가는 “츠베덴 지휘자는 순수한 연주자로서의 노하우와 감흥을 중시하며, 굉장히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주를 한다”며 “바이올린 악장 출신이라 현악 파트 리드에 상당한 강점이 있고 현재 서울시향의 연주 실력이 물이 올라 기대되는 측면이 있다. 말러의 강한 에너지를 품으면서도 7번과 같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잘 끌어낸다”고 평가했다.

젊은 지휘자들도 올 한 해 말러와 함께한다. 한국 클래식계를 이끄는 최수열 인천시향 음악감독, 홍석원 지휘자, 김선욱 지휘자 등이다. 홍석원은 부산시향과 8번(6월 18일, 부산콘서트홀), 김선욱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2번(10월 31일), 최수열은 인천시향과 오는 25일 ‘대지의 노래’(아트센터 인천), 12월엔 7번을 연주한다.

황 평론가는 “최수열, 홍석원은 젊은 세대에서 중견으로 발돋움하는 대표 지휘자로 이들에게 말러는 50대로 넘어가기 전 경험을 쌓고, 이후에 더 좋은 말러를 연주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과 같다”며 “쉽지 않은 작업과 도전이나 두 지휘자가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하고 말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기대를 모은다”고 했다.

왜 지금 말러인가…현대인의 포만감, 카타르시스의 폭발
말러는 생전 지휘자로는 추앙의 대상이었으나, 작곡가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에겐 늘 혹평과 비난이 따라다녔다. “지휘자가 취미로 쓴 음악”, “진부한 테마의 교향곡”, “음악적 논리의 부재와 혼돈”이라는 악평이다. 그만큼 많은 요소와 많은 이야기를 넣은 거대한 규모와 복잡한 선율을 가졌지만, 전개는 빈약하고 유기적 구조가 결여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말러의 음악은 다시 평가받는다.

허 평론가는 “말러 음악은 교향곡 안에 온 세상을 집어넣었다”며 “형이상학적 이상과 가치관을 비롯해 민속음악, 근대 리듬과 같은 통속적 요소도 많이 들어가있다. 이런 요소를 하나로 통합해 교향곡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봤다. 류태형 평론가도 말러 음악을 ‘압도적 정보량의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초미세 칩 안에 수만 개의 정보를 담는 현대의 메모리처럼, 말러의 교향곡은 가장 미세한 피아니시모부터 천둥 같은 포르테시모까지, 신경질적인 고통에서 천상의 평온함까지 극단적인 대조를 한 곡 안에 압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말러리안’이라는 팬덤까지 만들어지며 현대인이 ‘말러’에게 열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복잡함에 있다. 짧은 시간에 온갖 감정과 삼라만상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매일이 바쁜 현대인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다.

류태형 평론가는 “풍부한 정보량을 가진 음악은 시간 절약의 장점이 있다. 단시간 내에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이 정해진 시간에 최고조의 진폭으로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말러의 음악은, 자극에 익숙하고 효율적인 감정 소비를 원하는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이다. 실제로 말러의 음악은 클래식 안에서 록, 발라드는 물론 슬픔과 환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장르의 뷔페’와 같은 포만감을 준다.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물량 공세’로 쏟아내는 사운드의 함성은 그 어떤 음악도 흉내낼 수 없는 음량으로 도파민 촉진제 역할을 한다.

허명현 평론가는 “압도적인 음향과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크다”며 “쇼트폼 시대에 익숙한 관객들이 굳이 말러 음악을 찾는 것은 그 순간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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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여명을 잇는 ‘가교’로 불리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퍼블릭 도메인 제공]



말러의 음악은 단순히 거대한 소리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구스타프 말러의 ‘자서전’이자 ‘세계를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다. 음표로 기록된 인간 생의 빅데이터 그 자체, 이것이 바로 말러 교향곡인 셈이다.

허 평론가는 “교향곡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행성”이라며 “말로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은 각각의 행성들을 모두 둘러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1번부터 9번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젊은 에너지로 시작해 삶과 죽음, 혹은 이별과 초월과 같은 사유로 나아가기에 연주자도 청중도 말러의 거대한 서사를 따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황 평론가는 “말러 교향곡은 내용도 복잡하고, 층위도 복합적이라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라며 “듣다 보면 너무도 거창하고 복잡해 미궁에 빠지는 경험을 하나 꾸준히 접하면 말러는 유대인으로서의 방황과 개인적 불행을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하려 했던 휴머니스트이자 장황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쓴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말러의 교향곡엔 우리 시대의 불안을 화려하게 위로하는 시대정신이 담겼다. 초기 교향곡인 1~4번은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세계관을 공유하며 자연, 삶과 죽음, 동화 같은 천상의 삶을 노래한다. 이 시기의 말러는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을 순수한 민요적 선율에 담아냈다. 중기 교향곡인 5~7번에선 더 복잡하고 내밀한 인간의 심리와 투쟁을 다룬다. 5번의 장송행진곡과 6번의 ‘비극적’ 중 망치 소리는 인생의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몸부림을 투영한다. 후기 교향곡 8~10번과 ‘대지의 노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시도와 삶에 대한 긍정과 이별, 초월적 위로를 담아낸다.

황 평론가는 “말러 음악 안엔 베토벤적 의지, 모차르트적 천진함, 슈만의 문학적 환상, 바그너적 장엄함 등이 한데 어우러져 대하드라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라며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성공한 음악가,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철인의 모습을 한 말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깊이 알고자 했고, 우리 인생을 긍정하려 노력했다. 난해하고 복잡하지만 이 음악을 통해 청중 역시 위로와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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