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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외제차 끌던 세입자, 보증금 빼돌리고 "코인 따서 갚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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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층 노린 '보증금 먹튀 사건' 발생
은행 측 '등기 1통'에 상환 책임 넘겨
중개업소는 "질권 설정, 나도 몰랐다"
서울 강남구에서 20년 넘게 원룸을 임대해온 A씨(83)는 최근 억울한 일을 겪었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입주한 세입자가 1억원 넘는 보증금을 가로챈 뒤 잠적해버린 것이다.

16일 경찰에 따르면 사건은 2023년 5월 시작됐다. 세입자 B씨(33)는 보증금 1억4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고 시중은행에서 전세자금 대출을 받았다. 부동산 계약 당일 임대인 A씨는 "전세대출에 동의하는 사인만 하면 된다"는 부동산 중개사의 말을 듣고 아무런 의심 없이 은행 서류에 서명했다.

그러나 당시 A씨는 이 계약이 '질권(우선변제권)' 설정 계약이란 점을 알지 못했다. 쉽게 말해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갚지 못하면 집주인이 대신 갚아야 하는 구조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중개사는 이런 내용을 A씨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았고 계약서에도 이를 명시하지 않았다.

계약 이후 은행은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통지서를 A씨의 주소로 등기 발송했다. 하지만 내용을 몰랐던 A씨는 단순한 안내 서류 정도로만 생각하고 통지서를 보관만 해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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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mini 생성 이미지


문제가 드러난 건 계약으로부터 약 2년이 흐른 지난해 7월이었다. 은행에서 "임차인이 대출금을 상환하지 않아 연체 상태"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A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기 퇴실을 요구했던 B씨에게 그가 요구한 계좌로 보증금을 돌려준 뒤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문의했지만 "그런 (질권) 계약인지 몰랐다"는 무책임한 답변만 돌아왔다.

고령의 A씨는 그간 이사를 나가는 임차인이 요구하면 보증금을 직접 돌려주는 방식으로 임대업을 해왔다. B씨 역시 입주한 지 1년 만에 개인 사정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면서 보증금 반환을 요구했었다. A씨는 이번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보증금을 보내줬다. A씨는 "20년간 세입자가 요구하면 그렇게 보증금을 돌려줬지만, 한 번도 문제가 된 적 없었다"고 토로했다.

잠적했던 B씨가 보낸 메시지를 보면 빼돌린 보증금을 가상자산(코인) 투자에 탕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30대 초반이란 나이에 5억원을 모았는데 잘못된 투자로 모두 날렸다" "부모님께 받은 집도 날려서 한 푼도 안 남았다" "손실 원인을 분석해 다시 일어서겠다" 등 변명을 거듭했다. 보증금을 가로채고도 코인 투자를 계속하겠다는 말에 가족들은 울분을 참아야 했다.

A씨 측은 끈질긴 연락 끝에 지난해 8월 말 임차인 B씨를 변호사 사무실로 불렀다. A씨의 딸은 "외제차를 끌고 다니던 임차인이 화장까지 짙게 하고 나타난 걸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며 "그해 8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건강까지 악화한 상태라 충격이 더 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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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임대인 A씨(83)와 임차인 B씨(33)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 재구성.


B씨는 이 자리에서 3000만원을 변제하고 나머지는 그해 10월까지 갚겠다고 공증했다. 그러나 이후 B씨는 갚을 돈을 1억원 넘게 남겨두고 다시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다. 은행의 독촉은 계속됐고 결국 A씨는 올해 1월 임차인이 남긴 대출 원리금과 연체 이자를 대신 갚았다.

16일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서울 수서경찰서에 임차인 B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지난 13일 고소인 조사를 시작으로 B씨의 소재, 보증금 사용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부동산 관련 제도에 밝지 못한 고령층 임대인을 상대로 세입자가 보증금을 가로채는 등 유사 피해가 반복되고 있어 노인을 위한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지역 한 자치구 관계자는 "A씨의 피해 사례와 같은 문제는 주택뿐만 아니라 상가에서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며 "전세자금 대출 구조를 잘 모르는 고령 임대인들이 은행 계좌가 아닌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직접 돌려줬다가 사기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전문가는 고령층을 위한 '대면 안내'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오기두 변호사(오기두 법률사무소)는 "임차인을 사기죄로 고소할 순 있지만 현행 제도상 은행이나 중개업소 책임을 묻긴 쉽지 않다"며 "고령 임대인을 대상으로 한 대면 안내 등 절차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호수 기자 lak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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