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왕사남’ 아직 안 본 사람 손!”
“영월 아직 안 가본 사람 손!”
누적 관객 수 950만 돌파 무렵에 드디어 나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본 사람에 합류했다. 그리고 홀린 듯이 다음날 바로 영월로 향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다. 열일곱 나이의 아직 앳된 그는 무더운 여름날, 한양을 떠나 약 일주일에 걸쳐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영월 땅에 다다른다. 최종 목적지는 물길이 휘감은 청령포. 이곳은 삼면은 강이 에워싸고 나머지 한 면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는, ‘섬 아닌 섬’이다. 영화에서 단종은 뗏목을 타고 청령포로 들어간다.
2026년 청령포는 여전히 육지 속 섬으로 남아 있다. 바다에 있는 진짜 섬도 연륙교가 놓여 육지처럼 편하게 오가는 세상. 아이러니하게도 ‘섬 아닌 섬’ 청령포로 들어가는 방법은 뱃길이 유일하다. 배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그래도 이러한 의도된 불편함 덕에 이 물길을 건너 청령포로 향하던 단종의 마음에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열일곱 단종이 뗏목 타고 간 청령포
지금도 1분 남짓 작은 배로 건너가야
관음송·망향탑에 남긴 슬픈 그리움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청령포 전경. |
청령포에 들어서면 이내 울창한 솔숲 속으로 접어들고, 노송들 사이로 단종 어소(御所·임금이 계시는 곳을 이르던 말)가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꼿꼿한 소나무들이 어소를 감싼 모습이 마치 주인 잃은 집을 호위하듯 느껴진다. 지금의 어소는 훗날 다시 세운 공간이다. 어소 위치를 전하는 비를 기반으로, 단종이 머물렀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했던 행랑채를 재현했다.
어소를 중심으로 단종의 흔적을 따라 청령포를 한 바퀴 걸어보자. 우선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관음송을 만난다. 나이만큼 웅장한 소나무는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단종이 여기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전한다. 단종과 함께하며 그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볼 관(觀)’자와 ‘소리 음(音)’자를 붙여 관음송이라 부른다. 관음송 근처 계단으로 오르면 단종이 한양 땅을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돌탑인 망향탑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도 만날 수 있다. 청령포에서 마주하는 장면은 모두 산수 좋은 풍광이거늘, 단종의 이야기가 어려서인지 어딘가 애달프게 다가온다.
단종의 서글픈 유배 생활은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한 영월 장릉이 청령포와 가깝다. 유일하게 수도권 밖에 자리한 조선 왕릉이라는 수식어가 능 주인의 비극적 삶을 대변한다. 장릉은 단종의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훗날 인정받은 추존 왕릉이라 다른 조선 왕릉과는 형태가 사뭇 다르다. 우선,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이 큰 단차를 두고 떨어져 있다. 지형에 맞춰 제향 공간을 조성하다 보니 능침 아래쪽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향로와 어로 역시 일자가 아니라 ‘ㄱ’자 형태로 한번 꺾여 있다. 또 하나 큰 차이점은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는 것이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과 충신부터 노비까지 268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왕과 사는 남자’로 친숙해진 역사적 인물 엄흥도의 정려각도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제향 공간을 돌아본 후 단종이 잠든 능침 공간에 올라본다. 능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가득하다. “차갑지요? 나갑시다. 따뜻한 데로 갑시다.” 엄흥도는 그 약속을 잘 지킨 듯하다.
‘단종과 엄흥도’ 이전 또 하나의 영월 브로맨스
청령포와 장릉, 그 사이에 하나 더 들어가야 할 역사적 장소가 관풍헌이다. 영월읍내에 자리한 관풍헌은 영월부 관아의 객사로, 단종이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한다. 홍수가 나자, 단종은 청령포를 떠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다. 경내에는 단종이 종종 머물며 시를 지었다는 누각 자규루도 남아 있다.
근방에 엄흥도가 시신 수습한 ‘장릉’
충신 제사 공간 등 다른 왕릉과 차이
단종의 묘, 장릉과 그가 생을 마감했다는 관풍헌. |
먹먹해진 마음으로 관풍헌을 나서는데 대각선 맞은편으로 청록다방이 보인다. 맞다. 영월에는 ‘단종과 엄흥도’ 이전에 우리에게 감흥을 준 또 다른 브로맨스가 있었지. 청록다방을 보는 순간, 영화 <라디오스타> 속 ‘최곤과 박민수’가 퍼뜩 떠오른다. 한물간 가수왕 최곤과 늘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매니저 박민수는 영월을 무대로 웃음과 감동이 어린 브로맨스를 선사했더란다. 그때도 지금처럼 영화가 입소문을 타면서 영월을 찾는 사람이 많았었다. 당시 제작팀은 별도의 영화 세트장을 만들지 않고 영월 곳곳을 오픈 세트장으로 활용했다. 덕분에 영월에 가면 영화 속 공간들을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영월은 그렇게 영화 그 자체였다.
영화 ‘라디오스타’ 청록다방 그대로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 촬영지도
곤드레 소금빵 등 이색 디저트 다양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라디오스타>의 흔적은 여전하다. 최곤과 박민수가 커피를 마시던 청록다방은 카페가 대세인 시대에 옛날식 다방 그대로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레트로한 분위기에 끌려 혹은 영화의 흔적을 따라 지금도 많은 여행자가 이곳을 찾아 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신다. 청록다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라디오스타박물관도 있다. 최곤이 라디오 DJ를 하던 옛 KBS 영월방송국 건물을 개조한 공간으로, 영화와 라디오의 추억 속으로 젖어 들기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두 사람이 함께 별을 보던 별마로천문대에 올라보자. 이곳에 서면 자연스레 고인이 된 안성기 배우의 명대사가 오버랩된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소소하지만 확실한 영월만의 매력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 촬영지 세종장여관. |
앞선 두 영화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건 아니지만 잔잔하게 영월의 매력을 알린 드라마가 또 있다.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는 감수성을 자극하는 따뜻한 영상미로, 소위 ‘모캘 폐인’이라 불리는 팬층의 영월행을 자극했다. 드라마 속 많은 공간이 영월에 실존한다. 중요한 배경이 된 모텔 캘리포니아 건물은 영월역 앞 세종장여관이다. 실제 영업 중인 숙박시설로, 지금도 ‘모텔 캘리포니아’라는 빈티지한 간판이 달려 있어 드라마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남자 주인공이 근무하던 가축병원도 여관 바로 인근에 있어 함께 돌아보기 편하다. 가축병원은 촬영 당시 외관이 그대로 유지되어 인증 사진을 남기기에도 좋다. 특히 이곳은 영월 여행객들을 위한 트래블라운지라 자유롭게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두 곳을 관람한 후 골목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동네 탐방에 나서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구옥들 사이로 옛 공간을 개조한 감각적인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이색 디저트를 판매하는 곳이 많아 눈길을 끈다. ‘영월소금빵’에서는 영월산 무농약 곤드레를 가미한 곤드레 고르곤졸라 소금빵을, ‘에이플’에서는 영월 사과로 맛을 낸 사과빵을, ‘별애별빵1984’에서는 영월 곤드레 카스테라를 선보인다. 100% 영월산 재료로 만드는 영월애빵으로 유명한 ‘기분조은 베이커리’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곳에서는 단종과 지역 농산물을 테마로 구성한 ‘단종의 후식 상차림’이 있어 ‘왕사남’으로 ‘단종 앓이’ 중인 여행자들이 들러볼 만하다.
영월 | 글·사진 김수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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