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한미약품 본사 [한미그룹 제공] |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1973년 한미약품공업으로 출발해 ‘한국형 R&D’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한미약품이 창사 53년 만에 거대한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 사이의 사상 초유의 갈등 끝에 박재현 대표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외부 출신 투자 전문가가 채우게 된 것이다.
이번 인선은 그간 전문 경영인인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와 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사이에서 불거진 갈등을 매듭짓기 위한 ‘4자 연합(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신동국 한양정밀 회장·라데팡스파트너스)’의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한미약품 내부에서는 대주주의 경영 간섭에 반발하고 있어, 전문경영인의 자율성보다는 대주주의 입김이 강하게 투영된 결과라는 평가도 나온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은 전날 이사회를 열고 황상연 HB인베스트먼트 PE부문 대표를 사내이사 후보로 선임하는 안건을 오는 31일 정기 주주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의했다. 황 대표는 LG화학 기술연구원과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 종근당홀딩스 대표 등을 거친 인물로, 주총을 거쳐 차기 수장에 오를 예정이다. 황 대표의 선임이 확정되면 한미약품 역사상 외부 영입 인사가 단독 대표를 맡는 첫 사례가 된다.
이번 인선의 이면에는 신동국 회장과 송영숙 회장의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다. 신 회장은 과거 고 임성기 회장의 고향 후배로 3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가족 같은 대주주’였다.
신 회장은 지난 2024년 초,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이 추진했던 OCI그룹과의 통합에 반대하며 ‘형제(임종윤·임종훈)’ 측의 손을 들어준 ‘킹메이커’였다. 당시 신 회장의 지지로 형제 측이 경영권을 장악하는 듯했으나, 이후 상속세 문제와 경영 방침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며 신 회장은 돌연 모녀 측과 손을 잡는 ‘전략적 유턴’을 선택해 ‘4자 연합’을 탄생시켰다. 송 회장은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을 조건으로 신 회장과 손을 잡았으나, 신 회장과 박 대표가 정면충돌하자 결국 ‘그룹 안정’을 명분으로 신 회장의 박 대표 교체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송 회장은 지난 5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대주주는 경영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견실한 방향을 제시하고 지지하며, 전문경영인은 부여된 권한과 책임 아래 회사를 이끌어가는 것이 한미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길”이라며 ‘선진 전문경영인 체제’의 독립성 보장을 강력히 촉구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공표 일주일 만에 신 회장과 갈등을 빚던 정통 ‘한미맨’ 박재현 대표의 퇴진이 결정되면서, 대주주의 현실적인 힘의 논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헤럴드DB |
▶“기술이전 직접 보겠다”…분쟁의 도화선 = 신 회장과 박 대표 간의 갈등은 경영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신 회장은 기타비상무이사 신분임에도 제약사의 핵심 기밀인 기술이전 계약서를 직접 검토하겠다고 요구했고, 박 대표는 보안과 전문성 문제를 들어 이를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신 회장은 한미약품의 주력 제품인 ‘로수젯’의 원료를 저가의 중국산으로 교체하라고 압박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박 대표는 “대주주의 비용 절감 논리가 선대 회장의 R&D 철학을 꺾고 있다”고 직격했으나, 신 회장은 이를 “사실무근”이라며 맞서며 갈등은 타협 불가능한 지점까지 치달았다.
박 대표와 신 회장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결정적 계기는 팔탄공장장의 성 비위 문제였다. 박 대표는 신 회장이 사내 성 비위 사건을 일으킨 임원을 비호하며 전문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연구개발(R&D)의 핵심인 제약사에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인사를 대주주가 감싸고도는 것은 선대 회장의 ‘인간 존중’ 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 박 대표 측의 시각이다.
이에 대해 신 회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관련 의혹을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부인했다. 신 회장 측은 오히려 박 대표가 연임 실패에 대한 보복성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맞서며 양측의 신뢰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열됐다.
이사회가 열리던 12일 한미약품 본사 1층에서는 직원들의 피켓 시위가 벌어졌다. 직원들은 신 회장이 성 비위 관련 임원을 비호하고 전문 경영을 간섭하고 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특히 신 회장이 이사회 의결까지 마쳤던 반포동 옛 호텔 부지 실버타운 개발 사업을 일주일 만에 독단적으로 뒤집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 사건은 현재 600억원 규모의 위약벌 소송으로 번진 상태다.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 이상섭 기자 |
1993년 입사해 33년 동안 한미를 지켜온 박 대표는 이사회가 종료된 후 남긴 입장문에서 “전문경영인이 반드시 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다만 한미의 근간인 ‘임성기 정신’과 ‘품질 경영’의 가치만큼은 합심해 꼭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저희 작은 저항과 외침이 임성기 정신 보존의 중요성에 경종을 울리는 밀알이 됐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 회장은 최근 코리포항 등의 지분을 매수하며 개인 지분과 한양정밀 보유분을 더해 총 29.83%의 지분을 확보, 한미약품그룹의 실권자로 등극했다. 주주 간 계약 기간이 끝나는 약 1년 반 뒤에는 다시금 경영권 분쟁이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약품그룹이 새로 내정된 외부 출신 황 대표 후보를 통해 ‘임성기 정신’을 보존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업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