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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때]"한 줄쯤은 괜찮겠지" 하고 넘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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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의 '출판인을 위한 저작권법'
인용과 요약, 캡처와 재가공이 일상이 된 현실
분쟁보다 방심에서 시작되는 출판 저작권의 감각
명언집·필사본·몰아보기까지…흐려진 '참고'의 경계
출처를 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문장들이 있다. 메모장에 잠깐 옮겨 적어둔 문장, 너무 여러 번 인용돼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흐려진 표현, '요약'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원문을 거의 대신하는 문장. 출판 저작권은 법원 앞에서 먼저 시작되지 않는다. 대개는 이런 작은 방심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파일 몇 개와 저장해둔 문장 몇 줄에서 먼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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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로 오가는 계약서가 있고, 교정지 위에 남은 붉은 표시, 번역 대조표와 표지 시안이 있는가 하면, 판권면에 들어갈 문구를 마지막까지 고치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는 제목을 줄이고, 누군가는 한 단락을 덜어내고, 누군가는 출처 표기를 다시 확인한다. 책은 한 사람이 썼다고 말하기 쉽지만, 인쇄 직전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은 늘 여러 손을 거친 결과물이다. 정지우의 '출판인을 위한 저작권법'은 그 손들의 경계를 톺아보는 책이다.

책이 자꾸 현실적으로 읽히는 것은 저작권을 거창한 권리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계약서 한 줄이 흐리게 써 있으면 나중에 무엇이 흔들리는지, 공저라고 묶어 부르지만 실제 권리 행사는 왜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지, 외주 디자이너가 만든 표지와 편집자가 손본 지면은 어디까지 누구의 몫인지. 저자는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실제로 자주 헷갈리는 자리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출판은 오래도록 취향과 신뢰의 세계처럼 보였지만, 막상 책 한 권을 끝까지 밀어본 사람들은 안다. "늘 이렇게 해왔다"는 말이 가장 불안한 문장일 때가 있다는 것을.

특히, 인용을 다룬 부분은 오래 남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흔들린다. 출처만 달면 괜찮다고 여기는 쪽, 혹은 혹시 문제 될까 싶어 아예 한 줄도 못 끌어오는 쪽. 그런데 원고 앞에서 실제로 흔들리는 것은 늘 그 중간이다. 내 문장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은 알지만, 막상 한 문단을 살리려고 남의 문장을 기대는 순간 그 선은 쉽게 흐려진다. 이 책은 그 흐릿해지는 순간을 판례와 사례로 붙잡는다. 명언집, 필사본, 요약정리집, '20분 몰아보기' 같은 형식이 왜 단순한 참고를 넘어 대체의 자리에 들어서는지 읽고 나면, 인용은 허용과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손의 습관 문제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법은 그 뒤에 따라온다.

책 후반부에서 종이의 문제는 화면의 문제와 겹친다. 캡처된 문장이 돌아다니고, 긴 글은 카드뉴스 몇 장으로 눌리고, 한 권의 책은 영상 요약본의 재료가 된다. 폰트 파일의 사용 범위, 뉴스 기사 활용, 인터뷰 발화의 귀속, AI 초고에 남은 인간의 흔적 같은 주제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이유도 거기 있다. 지금 출판의 경계는 제본선 바깥에서 더 자주 흔들린다. 책이 서점에 놓이기 전에 이미 플랫폼을 지나고, 문장이 독자를 만나기 전에 먼저 복제와 압축의 형식을 통과하는 시대다. 그러니 저작권은 더 이상 몇몇 법률가의 분야가 아니라 원고를 다루는 사람들의 생활 감각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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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법을 이야기 하면서도 저작권을 '겁주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무엇은 끝까지 확인해야 하는지, 무엇은 정당하게 써도 되는지, 그 경계를 미리 손에 익히게끔 친절히 설명한다. 사진 SBI


AI를 다루는 대목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문제는 자주 구호로 소비된다. 있다, 없다. 허용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는 그런 식의 단정이 잘 붙지 않는다. 프롬프트를 몇 번 고쳤는지, 어떤 문장을 버리고 어떤 표현을 다시 썼는지, 편집자가 어디서부터 개입했는지, 나중에 설명해야 할 것은 결국 그런 흔적들이다. 매끈하게 뽑힌 결과물보다 수정 이력과 교정 흔적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온다. 책은 그 사실을 조용히 짚는다. 창작의 권리는 선언으로 생기지 않고, 과정에 남은 손의 자국 속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것을.

정지우는 판례를 끌어오지만 판례에 숨지는 않는다. 법조문을 설명하지만 문장을 마른 채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책은 저작권을 겁주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무엇은 끝까지 확인해야 하는지, 무엇은 정당하게 써도 되는지, 그 경계를 미리 손에 익히게 하는 쪽에 가깝다. 출판 현장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거대한 소송보다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넘긴 한 줄일지 모른다. 이 책은 바로 그 한 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책은 다 찍혀 나온 뒤에야 독자의 것이 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전에도 이미 수많은 허락과 수정, 합의와 망설임을 거친다. 교정지의 빨간 표시 하나, 판권면의 작은 문구 하나, 삭제하지 못한 인용문 한 줄이 그 시간을 말해준다. '출판인을 위한 저작권법'은 그 잘 보이지 않던 시간을 앞으로 끌어낸다. 법을 설명하는 책인데, 다 읽고 나면 조문보다 먼저 자기 원고의 손버릇을 돌아보게 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출판인을 위한 저작권법 | 정지우 | sbi(한국출판인회의) | 188쪽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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