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수요 폭발로 촉발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이 뚜렷해지고 있다. 빅테크의 선제적인 물량 확보로 올 1분기 메모리 가격이 최대 180% 급등하는 등 ‘칩플레이션(Chip+Inflation)’ 현상이 가시화하면서다. 호황기를 맞은삼성전자(005930)와SK하이닉스(000660)는 과거 단순한 생산량 경쟁을 넘어 고부가가치 제품을 앞세운 ‘이익률(마진)’ 쟁탈전으로 전장을 옮겼다는 분석이다. 구조적인 메모리 공급난은 막대한 증설 비용과 물리적 공정 한계로 인해 2027년 하반기에나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춘절 이후 가격 급등…AI 인프라가 핵심 동력
12일 카운터포인트리서치가 개최한 웨비나에서 황민성 연구위원은 “올 1분기 메모리 가격이 전 분기 대비 100%가량 오를 것이라던 기존 전망을 훌쩍 뛰어넘어 130~180% 수준의 가파른 상승폭을 기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폭제는 지난달 중국 춘절 연휴였다. 연휴 직후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려는 초대형 데이터센터 기업(하이퍼스케일러)들의 물량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상승폭이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메모리 시장의 핵심 수요처도 재편됐다. 과거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며 최대 고객사로 자리했던 애플의 비중은 축소되고 그 자리를 엔비디아가 대체했다. 현재 엔비디아의 메모리 구매량은 애플의 3배에 달하며 전체 D램 매출에서 서버용과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차지하는 비중은 60%까지 커졌다는 게 황 위원의 분석이다.
가격을 밀어 올리는 근본적인 원인은 AI 산업의 급격한 성장이다. 최근 거론되는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나 선적 비용 상승 등 거시경제 변수보다는 빅테크 기업들의 대규모 AI 인프라 투자가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황 위원은 “과거 PC 혁명기처럼 현재 빅테크 기업들은 당장의 투자수익률(ROIC)을 따지기보다 AI 인프라 자체를 확충하는 데 집중하며 메모리 물량을 선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점유율 경쟁에서 수익성 극대화로 패러다임 전환
칩플레이션 국면에서 메모리 상위 기업들의 경쟁 패러다임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다. 과거에는 범용 제품의 생산량을 늘려 시장 점유율을 지키는 것이 관건이었지만 이제는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압도적인 생산 규모를 갖춘 삼성전자가 수익성 측면에서 우위를 점해왔다. 하지만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 시장을 SK하이닉스가 선점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황 위원은 “현재 HBM을 앞세운 SK하이닉스가 원가 경쟁력에서 다소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삼성전자가 차세대 HBM4 시장을 겨냥해 수익성 반전을 꾀하고 있는 만큼 양사의 이익률 1위 다툼이 올해 반도체 업계의 핵심 관전 포인트”라고 짚었다.
150조 원 투입되는 인프라 증설…“2027년 하반기나 물량 확보”
메모리 업체들은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공장 가동률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전체적인 공급 물량을 맞추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반도체 미세화 공정의 난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무어의 법칙이 둔화했고 메모리 3사의 평균 생산성 증가율 역시 10%를 밑돌고 있다.
대규모 공장 증설 역시 막대한 자본 투입이 전제돼야 한다는 분석이다. 황 위원은 “향후 글로벌 D램 생산 능력을 10% 늘리기 위해서는 약 20만 장 규모의 추가 생산 능력이 필요하다”며 “최신 10나노급 6세대(1c) 공정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7만 평의 클린룸과 장비가 요구돼 여기에 투입되는 자본만 150조 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각각 80조~90조 원 안팎의 대규모 설비투자를 집행하더라도 시장 수요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빠듯한 수준인 것이다.
올해 삼성전자 평택 4공장(P4)과 SK하이닉스의 청주 M15X 등 신규 공장이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하고 수율이 안정화되는 2027년 하반기 무렵에야 시장에 유의미한 물량이 공급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메모리 공급 병목이 2년 이상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세트(완제품) 업계의 원가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스마트폰 원가에서 D램과 낸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올 2분기부터 중소형 제조사들의 수익성 악화가 본격화될 우려가 커졌다. 반면 충분한 자본력과 부품 수급 능력을 갖춘 삼성전자와 애플 등 톱티어 기업들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시장 지배력을 한층 공고히 다질 것이라는 게 황 위원의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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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갑 기자 ga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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