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소·중견기업계가 이란 사태 여파로 브렌트유·WTI 등 국제유가가 9일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관세와 고환율 등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로 국제유가까지 폭등하면서 기업들의 경영계획에도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에너지비용이 제품 원가에 차지하는 비중이 큰 기업일수록 시름이 깊다. 중동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만큼 국내 중소기업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 유가 충격에 수입 원자재· 에너지 다소비 기업 ‘흔들’
유가 급등에 따른 원자재와 물류비 상승에 민감한 건자재 업계의 불안감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건설경기 침체로 인한 전방산업 악화로 수익성에 비상이 켜진 가운데 중동사태로 추가 비용 부담이 생기면서 고통이 가중되는 모양새다.
한찬수 한국시멘트협회 이사는 “최종 소비자인 레미콘쪽이나 건설 쪽에 시멘트를 공급하려면 벌크 시멘트 트레일러(BCT) 등을 움직여야 하는데 유가 상승으로 물류비가 엄청나게 늘 것”이라며 “시멘트를 팔면 팔수록 물류비도 증가해 판매를 해도 남는 게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직후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당시 국제 유가 10% 상승 시 시멘트·레미콘 등 콘크리트 제품은 0.21%, 건설용 골재·석재는 0.19%, 철근은 0.12% 등 생산 비용이 오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 시멘트 제조사의 한 관계자는 “시멘트 출하량이 급감한 상황에서 친환경 설비 투자는 지속하는 상황에서 중동사태로 원재료인 유연탄 가격까지 상승해 시름이 깊다”며 “딱히 별다른 대비책이 있는 것은 아니고, 원가 인상분을 회사가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보이면서 가구 업계 역시 비축된 원자재가 소진될 경우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국내 가구업계는 수입 원자재 비중이 높아 대외 변수에 취약한 구조다. 실제 산림청의 2024년 ‘목재이용실태조사’를 보면 수입 원목과 수입 목재 제품을 포함한 수입 목재 이용량은 2123만㎥에 달했다. 반면 국산 목재 이용량은 518만㎥에 그쳤다.
국내 가구업계 관계자는 “규모가 큰 기업을 제외하고 영세 가구업체들은 비축된 원자재가 통상 1~2개월에 불과할 것”이라며 “비축분량이 많아도 가구는 크기가 커 보관료 부담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제지업계도 국제 유가 상승으로 인해 비상이 걸렸다. 유가와 연동된 액화천연가스(LNG) 및 산업용 전기요금 폭등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생산 원가가 대폭 오를 것으로 우려해서다.
제지 산업의 경우 종이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스팀과 전력을 사용하는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를 띠고 있다. 이에 LNG 및 전기요금 등 에너지 가격 변동이 수익성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제조 원가에서 에너지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10~15%에 달하는 만큼, 유가 급등은 곧바로 영업이익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한솔제지, 무림제지 등 주요 제지 기업들은 향후 에너지 비용 변화에 예의주시하면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제지연합회 관계자는 “장치 산업인 제지업의 특성상 매번 유가 변동에 따라 수익성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면서 “당장의 대책을 세우긴 어렵겠지만 앞으로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전력 의존도를 다각화시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비용 부담에 결국 가격 인상 카드 ‘만지작’
국제유가와 물류비는 앞으로도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문식 한국주유소운영협동조합 이사장은 “중동사태로 원유 수송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4~5개월 분이 묶여있다”며 “당장 출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정유사는 생산 가동률 줄이고 감산하기 때문에 유가 상승은 계속될 것 같다”고 진단했다.
중소기업계 한 관계자는 “현지 물류사들이 긴급분쟁 할증료라며 컨테이너당 100원 하던 것을 150원으로 받고 있다”며 “물류사가 비용 부담을 화물을 맡긴 화주에게 직접적으로 전가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지에서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미 일부 기업들은 가격 인상 방안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시멘트 제조사의 한 관계자는 “당장 원가상승으로 인해 손해가 나고 있는 상황이지만 건설사를 포함한 업계 전반이 힘든 상황이라 바로 가격 인상 얘기를 꺼내기 참 어렵다”면서도 “우선은 자체적으로 견뎌보겠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 가격인상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가구업계 관계자도 “그간 고환율·물가상승 등 여파로 다수 가구 업체가 가격 인상을 검토 중이었던 상황”이라며 “중동사태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 업계가 전반적으로 가격 인상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환율과 물류비 상승을 이유로 선제적으로 가격 인상을 단행했던 페인트 업계는 추가 인상 필요성도 보고 있다. 삼화페인트는 지난달 각 거래처에 주요 제품 공급가격을 3월 1일부터 최소 10% 이상 인상한다는 공문을 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노루페인트 역시 지난해 11월 건축용 주요 제품군 가격을 평균 3~5% 올렸다. 노루페인트 관계자는 “외부 변수가 장기화돼 원가 부담이 확대될 경우 추가 조정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닐·플라스틱 제조업계는 이미 석유 기반 원재료 가격 인상 직격탄을 맞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비닐 포장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비닐 포장재를 만드는 데 폴리에틸렌을 사용하는데 폴리에틸렌 공급가를 올린다는 얘기를 거래처에서 들었다”며 “비닐 포장재는 사실 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부분이라 원료 가격이 오르면 장사 자체를 할 수가 없어 막막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비닐 제조업체 대표 B씨는 “이번달에 원료인 나프타를 ㎏당 15만~20만 원 올린다고 통보가 왔고 다음달엔 40만원 얘기가 나온다”며 비닐을 생산하는 공장들은 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거래처가 끊길까봐 원재료값 올라도 판매 가격을 쉽게 못 올린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그는 “안 그래도 불황이라서 거래처들이 가격 내려줄 수 없냐고 하는 상황인데 올린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지 두렵다”며 “(원료 공급사들은) 전쟁 전에 이미 입고된 원료들이 있을 텐데 바로 가격을 올려버리니 영세 업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말헸다.
현재 중소벤처기업부는 국내 중소기업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중동 국가 수출 피해·애로 유형 가운데 29%에 해당하는 9건이 물류비 증가인 만큼 정부는 관련 지원 강화에 착수했다. 중기부는 유가 상승 등과 관련해 수출바우처를 통한 국제운송비 지원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유가 급등은 물론 중동 피해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들, 트럼프의 ‘이란 삭제’ 일주일 풀스토리
박우인 기자 wipark@sedaily.com류석 기자 ryupro@sedaily.com김예솔 기자 losey27@sedaily.com정유나 기자 me@sedaily.com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