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총선에서 승리를 눈앞에 둔 발렌드라 샤 총리 후보. [AFP] |
[헤럴드경제=이정환 기자] 검은 선글라스, 짧고 강한 메시지 그리고 기성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
네팔 총선이 낳은 가장 강렬한 장면의 중심에는 발렌드라 샤 ‘발렌’이 있었다. 래퍼로 이름을 알린 그가 수도 카트만두 시장을 거쳐 이제는 차기 총리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떠올랐다.
2025년 ‘Z세대’ 반정부 시위 이후 처음 치러진 이번 총선에서 그는 K.P. 샤르마 올리 전 총리의 텃밭인 자파-5에서 6만8348표를 얻어 1만8734표에 그친 올리를 큰 격차로 눌렀다. 현지 언론은 이 승리로 발렌의 총리행이 사실상 굳어졌다고 평가했다.
발렌의 정치적 매력은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네팔의 전통적 엘리트 정치 문법으로 성장한 인물이 아니다. 전통 아유르베다 의술을 하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시에 끌렸고, 이후 투팍 샤커와 50센트 같은 미국 래퍼들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인도에서 구조공학 석사과정까지 밟았지만, 대중이 먼저 기억한 것은 엔지니어가 아니라 기득권의 부패를 겨누는 래퍼 발렌이었다.
그의 노래는 곧 정치적 언어가 됐다. 2019년 발표한 대표곡 ‘발리단(Balidan·희생)’은 네팔 지배층을 정면으로 겨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튜브 조회 수는 1200만 회를 넘어섰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청년층의 감정과 맞물렸다. 그는 방송 토론보다 소셜미디어를 택했고, 그 공간에서 수백만 팔로워와 직접 연결됐다. 주류 언론을 우회해 유권자와 곧바로 만나는 이 방식은 훗날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 무기가 됐다.
발렌드라 샤 총리 후보. [로이터] |
정치 입문도 파격이었다. 발렌은 2022년 카트만두 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기존 정당 후보들을 꺾고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이변’으로 불렸던 승리는, 시간이 지나며 기성 정치권에 대한 경고로 해석됐다. 시장 재임 시절 그는 쓰레기 처리와 도시 인프라, 의료 서비스 개선에 집중하며 행정가 이미지를 쌓았다. 동시에 노점상과 무토지 주민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인권단체의 비판도 받았다. 개혁가 이미지와 권위적 행정 논란이 함께 따라붙은 이유다.
발렌을 전국적 정치 아이콘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는 2025년 9월의 유혈 시위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규제와 부패, 실업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Z세대’ 시위는 네팔 전역으로 번졌고 77명이 숨졌다. 결국 올리 당시 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발렌은 이 격변의 순간, 거리의 분노와 온라인 여론을 묶어내는 상징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제 당신들의 세대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청년층의 정치적 열망을 자극했다.
그는 안전한 길 대신 가장 위험한 길을 골랐다. 카트만두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도 총선 출마지는 자신의 안방이 아니라 올리의 아성인 자파-5였다. 이 선택은 단순한 지역구 전략이 아니라 ‘낡은 정치와 새 정치의 정면충돌’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실제 결과도 극적이었다. 발렌은 74세의 올리를 거의 5만 표 차로 꺾었고, 이 승리는 세대교체 요구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라 표로 증명됐음을 보여줬다.
발렌 개인의 승리는 곧 정당의 파괴력으로 이어졌다. 그가 총리 후보로 합류한 중도 성향의 국민독립당(RSP)은 이번 선거에서 구정치 세력을 밀어내며 돌풍을 일으켰다. 카트만두포스트에 따르면 8일 기준 RSP는 지역구 80곳에서 승리했고 42곳에서 선두를 달리며 과반을 넘보는 흐름을 이어갔다. AP와 로이터도 RSP가 전통 정당들을 크게 앞서며 차기 정부 구성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전했다.
다만 발렌의 앞길이 장밋빛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강한 대중성, 압도적 온라인 영향력, 반부패 상징성만으로는 부패와 비효율이 뿌리 깊은 국가 시스템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발렌이 총리가 되더라도 결국 승부는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팀과 전문가를 꾸릴 능력’에서 갈릴 것이라고 본다. 랩으로 체제를 꾸짖던 청년은 이제 국가 운영이라는 가장 무거운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네팔 청년들이 그에게 건 기대가 혁명의 언어에 머물지, 통치의 성과로 이어질지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험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