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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특수지의 산실’ 한솔제지 천안 공장을 가다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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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가공 공정이 끝난 종이. 롤에 감겨 다음 공정을 위해 이동 대기 중이다. 한솔제지 천안공장 PM52는 분당 600미터 이상의 속도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홍석희 기자]



펄프가 종이로 다시 태어나는 100미터 초지기의 심장
분당 720미터 시간당 40km가 넘는 종이를 뽑는 ‘초지기’
“종이 공정의 8할은 결국 말리는 작업”
펄프에서 롤까지,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2026년 3월 5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에 자리 잡은 한솔제지 천안공장 입구에는 거대한 카고 트럭들이 밀려들었다. 트럭 적재함에는 흰색 상자 모양의 펄프가 빼곡히 실려 있었다. 펄프는 멀리서 보면 스티로폼 블록 같아 보인다. 펄프는 2㎜ 안팎의 두께에 가로 90㎝ 세로 70㎝ 높이 50㎝정도의 크기로 운반된다. 이 묶음 하나를 ‘펄프 베일’이라 부른다. 흰색이라 가벼워 보이지만 무게는 성인 남성 몸무게의 3배가 넘는 250㎏이나 된다. 펄프 베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종이의 양을 A4용지로 환산하면 약 270㎏에 해당하고 이는 A4용지 500매 묶음 약 100개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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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원재료인 펄프가 베일 형태로 컨베이어 벨트에 놓여져 지료가 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직육면체 형태의 펄프 베일 하나는 무게가 250㎏에 이른다. [홍석희 기자]



펄프는 물속에서 풀어져 종이의 원재료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펄프를 감싸고 있는 포장지 역시 펄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별도로 포장을 뜯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이같이 생긴 펄프 베일 덩어리는 물속으로 그대로 들어가 녹는다. 모터 분쇄작업을 거친 ‘죽’ 형태의 소재는 ‘지료(Paper stock)’라고 불린다. 지료의 구성은 펄프 약 1%, 물 약 99%다. 종이 1톤을 생산하는 데에는 약 20톤의 물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종이는 사실상 물 위에서 만들어지는 산업에 가깝다.

안전모를 받아 썼다. 생산동에 들어가기 전 공장측에선 ‘실리콘 귀마개’를 제시했다. 너무 시끄러우니 쓰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동행인과의 의사 소통, 질문과 답을 위해서 귀마개를 쓰지는 않았다. 생산동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소음이 쏟아졌다. 기계음과 진동이 뒤섞였다. 공기를 가르는 고압의 바람소리와 ‘윙~’하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공장을 가득 채웠다. 공기는 뭉근하고 습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이곳 기계들은 하루 24시간, 365일 멈추지 않는다.

한솔제지 천안공장의 심장, PM52를 직접 봤다. PM은 페이퍼 머신(Paper Machine)의 약자다. 5는 천안공장을, 2는 이 공장에서 두 번째로 들어선 기계를 의미했다. 천안공장엔 PM(PM51. PM53)이 3기, CM(51, 52, 53)이 3기가 설비돼 있다. CM은 코팅머신(coating machine)의 약자다. PM52는 폭 8미터, 높이 9미터, 길이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 장비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기계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규모다.

PM은 초지기로 불린다. 한자로는 뽑을 초(抄), 종이 지(紙), 기계 기(機)다. 제지업에서 종이를 연속적으로 빠르게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계가 초지기다. 이 가운데 ‘초(抄)’는 뽑을 초, 또는 뜰 초로 불린다. 종이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당시 물에 풀어진 지료를 뜰채로 떠서 종이를 만들었던 것이 단어의 의미가 됐음직 했다. 공장 관계자는 ‘종이를 만든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조선업에서 배를 ‘짓는다’고 표현하듯, 제지업계에선 종이를 ‘뽑는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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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망에 뿌려진 지료에서 물이 빠지는 공정. 1차로 물이 빠진 종이는 다음 단계인 말리는 공정으로 이동한다. [홍석희 기자]



첫 번째 공정은 지료를 쇠그물 형태의 와이어 위에 뿌리는 작업이다. 초지기의 시작점인 헤드박스에서 지료가 폭을 맞춰 분사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일함이다. 지료가 고르게 퍼지지 않으면 종이 두께가 들쭉날쭉해지고 품질이 떨어진다. 와이어 위로 퍼진 지료는 서서히 물이 빠지면서 종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거의 물에 가까운 상태였던 지료가 점점 섬유층을 만들며 얇은 종이막으로 변한다.

이후 공정은 ‘물 짜내기’다. 아직 물기가 많은 종이를 거대한 롤러 사이로 통과시키며 물을 물리적으로 짜낸다. 이 단계에서 종이의 기본적인 강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종이는 여전히 젖은 상태다. 기자가 현장에서 느낀 종이 제조 공정의 핵심은 ‘말리는 작업’이었다. 공정의 대부분이 건조 과정에 집중돼 있다. 건조부에 들어가면 거대한 드럼 형태의 실린더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실린더 내부에는 증기가 흐르고 있으며 표면 온도는 최대 130도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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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공정. 이 공정은 내부 온도가 높아 투명 플라스틱 칸막이로 외부와 구분됐다. 한솔제지 천안공장에선 외부에서 스팀을 구입해 드라이 공정에 사용했다. 에너지 집적 산업이기도 한 종이 산업은 전체 제조 원가의 10% 가량이 전기 등 에너지 비용이다. 에너지 비용상당 부분은 ‘드라이 공정’에 투입된다.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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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자르는 슬리팅 공정. 사진 중앙에 위치한 둥근 기계 장치가 종이를 자르는 칼 역할을 한다. 칼의 위치를 좌우로 조정해 고객의 요구에 맞는 폭으로 종이를 재단한다. [홍석희 기자]



종이는 이 뜨거운 실린더를 따라 이동하며 수분을 날려 보낸다. 처음 지료 상태에서 99%였던 물은 이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약 1% 정도의 수분이다. 공장 내부에서도 이 건조 공정은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돼 있다. 플라스틱 칸막이로 나뉘어 있는 이유는 말릴 때 나오는 온도가 워낙 높기 때문이다. 건조 공정을 통과한 종이는 또 다른 처리인 전분 처리 과정을 거친다.

전분은 주로 옥수수 녹말가루를 사용하는데, 전분 처리를 하는 이유는 종이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고 인쇄 적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후 다시 한 번 더 전분을 말리는 건조 작업이 이어진다.

초지기 내부를 흐르는 종이는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날 공장의 생산 속도는 분당 약 660미터. 설비의 최대 속도는 분당 720미터지만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약간 낮춘 상태였다. 기계가 정상 속도로 돌아간다면 종이는 1분 만에 축구장 길이를 훨씬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한시간에 40㎞가 넘는 길이의 종이를 생산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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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이 마쳐진 종이가 롤 형태로 이동을 기다리고 있다. 한 롤에 말려져 있는 종이의 길이는 50㎞에 이른다. [홍석희 기자]



건조와 표면 처리까지 마친 종이는 거대한 롤 형태로 감긴다. 종이 롤은 천천히 회전하며 다음 공정으로 이동한다. 고객사의 요청에 맞춰 롤의 폭도 잘라진다. 슬리팅 공정이다. 일부는 낱장으로 재단되기도 한다. 종이에 이물질이 묻거나 색상이 다른 경우엔 검수 과정에서 걸러진다. 문제가 있는 특정부위는 기계 설비에 의해 자동으로 지목이 되는데, 해당 부분을 추후 검수 과정에서 찾아내 해당 부분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특수지가 되는 진짜 여정은 코팅 공정부터다. 천안공장은 CP 3대를 설비하고 있다. 예컨대 편의점 계산대에서 흔히 받는 영수증의 소재인 감열지(感熱紙)는 이 코팅 공정을 통해 완성된다. 열을 가하면 색이 변하는 감열층이 원지 위에 얹혀야 비로소 영수증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팬시지는 또 다른 세계다. 색감과 광택, 촉감, 표면의 무늬와 질감이 상품성을 결정하는 팬시지는 코팅 원료 자체가 달라진다.

한솔제지는 장항, 대전, 천안, 신탄진 등 국내 여러 거점에서 인쇄용지, 산업용지, 특수지, 감열지 등 다양한 종이를 생산한다. 그 중 천안공장은 특수지 전문 공장으로, 팬시지와 정보용지, 감열지 등을 집중 생산한다. 특수지는 부가가치가 높은 종이인데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이다. 같은 설비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종이를 생산하다는 작업은 같은 종이만을 계속 찍어내는 작업보다 공정 운영 난이도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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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기 공정 과정



모든 공정을 마친 종이는 포장 라인으로 이동한다. 포장이 끝난 종이 롤은 다시 지게차에 실려 출하 대기 공간으로 옮겨진다. 천안공장에서 출하되는 종이는 월 8000톤 이상이다. 공장 내부에는 약 1만3000톤 규모의 재고가 보관돼 있다. 약 한 달 반 정도 생산량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거대한 롤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모습은 작은 창고라기보다 하나의 종이 도시처럼 보였다.

공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초지기의 움직임이었다. 길이만 100미터에 달하는 설비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며, 물과 섬유를 한 장의 종이로 바꿔내는 과정은 산업 현장의 압도적인 규모를 그대로 보여줬다. 한솔제지 관계자가 ‘보신 소감이 어떠시냐’고 물었을 때 기자는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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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들이 롤 형태로 배송을 준비중이다. 이곳에 보관된 종이 재고는 1만3000톤 가량으로 약 1달반치에 해당한다.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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