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3일 필리핀 국빈 방문을 통해 49조 원 규모의 필리핀군 현대화 사업에 한국 방산 기업의 적극 참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잠수함 도입을 포함한 해군 전력 증강 사업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을 확대하기로 양국이 뜻을 모으면서 이번 순방이 동남아시아 방산 시장 공략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냥궁에서 페르디난드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산 방산 수출을 핵심 의제로 논의했다. 특히 개정 사항을 반영한 ‘특정 방산 물자 조달을 위한 시행 약정’을 통해 방산 분야 수의계약 대상 업체 범위를 확대하고, 무기 체계 유지·보수(MRO) 및 후속 군수 지원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단순 무기 판매를 넘어 장기적 운용·지원 체계까지 포괄하는 구조를 구축한 셈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승인한 ‘호라이즌 프로젝트’는 2035년까지 약 49조 원을 투입하는 필리핀군 현대화 계획으로 특히 해군력 증강이 핵심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잠수함 도입의 필요성이 커졌고 사업 완료 시점을 앞당기기 위한 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이번 약정 개정으로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 방식의 길이 넓어지면서 한국 기업이 잠수함 사업을 수주할 가능성도 한층 높아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실제 양국은 지난해 10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산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4개월여 만에 이뤄진 이번 정상회담은 그 연장선에서 구체적 제도 정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수교 77주년에 맞춰 성사된 국빈 방문이라는 상징성도 더해졌다.
필리핀은 한국이 동남아 국가 가운데 최초로 수교한 국가이자, 아시아 국가 중 최초이면서 최대 규모로 한국전쟁에 파병한 전통적 우방이다. 이 같은 역사적 유대와 안보 협력 경험이 방산 협력 확대의 신뢰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공동 언론 발표에서 ‘남중국해’를 직접 언급한 뒤 “양국 정상은 해양 분야를 포함한 국제법 원칙의 수호 필요성에 공감했다”며 방산 및 안보 협력에 무게를 실었다.
잠수함 사업과 관련해 업계는 한국 측 제안이 경쟁력을 갖췄다고 보고 있다. 한화오션은 3000톤급 도산안창호급(KSS-Ⅲ급) 잠수함과 종합 패키지 거래를 제안한 바 있다. 빠른 납기, 비교적 유연한 기술이전 조건, 운용 인력 교육 및 유지·보수까지 포함한 통합 지원 모델이 강점으로 거론된다. 수의계약 범위가 확대되면서 프랑스 나발그룹의 스코르펜급, 스페인 나반티아의 S-80급 등과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 대통령은 공동 언론 발표에서 “인프라·방산 등 전략적 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며 “한국 방산 기업이 필리핀군 현대화 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조선, 원전, 공급망, 인공지능(AI), 디지털 등 신성장 분야에서도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방산 외에도 양국은 디지털·문화·보훈·경찰 협력, 무역·투자·경제 협력, 지식재산 분야의 AI 활용 등 다수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조선 협력과 관련해 이 대통령은 “선박 건조량 기준 세계 2위와 4위인 조선 강국 간 협력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며 공동 성장의 시너지를 강조했다. 신규 원전 사업과 핵심 광물 협력에 대해서도 “최적의 파트너이자 미래 핵심 파트너”라는 점을 부각했다.
양 정상은 최근 중동 정세와 관련해서도 공동 언론 발표문에 입장을 담았다. 이 대통령은 “중동의 안정과 평화가 조속히 회복되기를 희망한다”며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국 정부의 대화 재개 노력을 지지해준 데 감사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4일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생존 참전 용사 및 후손을 만날 예정이다. 이어 ‘한·필리핀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해 방산, 원전, 핵심 광물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하고 양국 기업인들을 격려한다. 동포 오찬 간담회를 끝으로 이번 필리핀 국빈 방문 일정을 마무리한다.
마닐라=전희윤 기자 heeyoun@sedaily.com송종호 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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