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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s Story #513] "꼭 저희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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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IT 자산의 가치를 데이터로 끌어올리는 피에로컴퍼니 박민진 대표

난방도 냉방도 안 되는 건물이었다. 고가도로 옆, 50년 된 건물의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월세 40만 원. 피에로컴퍼니(Pierrot Company)는 그곳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그 앞을 가끔 지나갈 때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회라는 단어치고는 가벼운 톤이었다. 그 시절을 꺼낼 때 박민진은 잠깐 웃고, 곧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고생담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이 먼저 왔다.

마루180.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역삼동의 창업 공간이다. 벽돌이 드러난 벽면과 흰 철제 계단이 교차하는 라운지 한쪽에서 만났다. 박민진은 검은 후드 집업 차림이었다. 왼쪽 가슴에 피에로컴퍼니 로고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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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진 피에로컴퍼니 대표 (c)플래텀


피에로라는 사명이 떠올랐다. 무대 위의 피에로는 늘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만, 백스테이지에서는 피나는 준비가 따른다. 고객이 보는 것은 무대여야 한다는 뜻을 사명에 새긴 사람이다. 고생담을 무대 위로 꺼내지 않는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캐나다 시민권자.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한 사람이 서울에서 창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처음부터 지금의 사업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국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박민진은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를 좋아했다.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갔지만, 출시 가격은 점점 올랐다. 한 명의 소비자로서 부담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고 시장에 발을 들였다.

"제조사들이 워낙 제품을 잘 만들다 보니, 중고와 새것의 내구성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20-30%, 크게는 40-50%까지 저렴해요."

그 만족감이 관심으로, 관심이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중고 시장은 이른바 레몬 마켓이었다. 정보의 비대칭이 심해, 아는 만큼 혜택을 보고 모르면 손해를 보는 구조.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중고 기기의 가치를 누릴 수 없다는 것 — 그것이 풀고 싶은 문제가 됐다. 금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중고 기기의 활용 가치를 넓힐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업은 캐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했다. 캐나다구스 같은 프리미엄 아우터 중고품을 사서 재포장한 뒤, 정식 수입이 없던 한국에 넘기는 리셀이 첫 번째였다. 대학에서는 공연 기획사를 차렸다. 캐나다에 한인이 많은데 한국 셀럽을 볼 기회가 없어, 직접 초청 공연을 기획했다. 그 다음은 자전거 브랜드 '피에로 바이시클스(Pierrot Bicycles)'. 대중교통비가 치솟던 시기, 캐나다에는 괜찮은 로컬 자전거 브랜드가 없었다. 중국에서 제조하고 캐나다에서 유통해, 토론토 신문에 실릴 만큼의 인지도를 만들었다. 피에로컴퍼니라는 사명은 이 자전거 브랜드에서 왔다.

없는 것을 찾아내는 눈이었다. 한국에 없는 캐나다 아우터, 한인에게 없는 공연, 캐나다에 없는 자전거. 그리고 첫 사업이 이미 국경 간 중고품 거래였다는 사실이 눈에 밟혔다. 지금의 글로벌 아비트라지도, 따지고 보면 고등학생 때의 감각이 데이터를 만난 것이다.

토론토 온타리오예술디자인대(OCAD University)에서 광고학을 전공했다. 사업들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지만 기하급수적 성장이 가능한 모델은 아니었다. 벤처가 활성화되는 시기를 만나면서, 더 큰 판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약 15년의 캐나다 생활을 접고 스물일곱에 한국에 왔다. 성균관대에서 MBA를 마치고, 현재는 KAIST에서 Impact MBA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사업을 해왔지만 경영학을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MBA 과정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2018~19년, 한국의 애플 플래그십 스토어는 가로수길에 딱 한 곳. 공인 수리 서비스 센터도 전국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캐나다에서는 어디서든 쉽게 수리할 수 있었던 애플 기기가, 한국에서는 고장 나면 난감한 물건이었다. 그 간극을 보고 서울에 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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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고(phoneGO)라는 브랜드로 처음 시작한 사업은 애플 제품 수리 중개 서비스였다. 소비자가 정보 비대칭으로 손해 보지 않도록 수리 업체를 연결해주는 모델. 전국 500여 곳의 수리점과 제휴를 맺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밥그릇을 뺏어간다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2020년 법인을 설립했지만, 이용료를 부과할 대상이 애매했다. 이윤 창출에 실패했다.

방향을 틀었다. 중고폰 거래 시장이 커지던 시기, 고객이 기기를 매각할 때 매입 업체가 역으로 가격을 입찰하는 온라인 경매장을 만들었다. 매출이 조금씩 발생했다. 그러나 곧 한계가 보였다. 진입 장벽이 없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다시 피보트. 수리도 할 수 있고 거래도 할 수 있으니, 직접 매입해서 수리하고 팔아보자. 그러나 기기도 수리비도 비싸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판매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박민진이 웃었다.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힘이 빠진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럼, 빌려줘 보자' 하고 시작한 게 지금까지 온 거죠."

수리 중개, 역경매, 매입 후 판매. 세 번 부딪히고 네 번째에 구독 모델을 찾았다. 500곳의 수리 네트워크는 남았다. 실패가 인프라가 됐다. 그 사이에도 박민진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기업들을 방문할 때마다 창고와 서랍에 쌓여 있는 기기들. 고장 나서가 아니라 새것을 들이면서 구석에 밀려난 것들. 멀쩡한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것들.

문제는 수리가 아니라 순환이었다.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것.

"제가 크게 착각했던 것 중 하나가, 창업자가 생각하는 시장의 문제는 창업자가 정의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고객이 정의하는 것이 문제예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걸 깨달았습니다."

박민진은 그 3년을 암흑기라 불렀다. 창업을 잘한 것 같긴 하지만 추천하고 싶진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100 중 95가 힘들고 5가 좋은데, 그 5 때문에 하고 있다고. 지금도 10개를 시도하면 9개는 실패하지만 한 가지는 고객이 만족해준다고. 그것으로 버틴다고. 숫자부터 말하고 의미를 나중에 붙이는 사람이었다. 100, 95, 5. 감정 대신 비율로 자기 상황을 정리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묵직했다.

그 3년을 지나며, 피에로컴퍼니의 사업은 세 겹으로 쌓여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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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모델을 다시 피보트했다. 스마트폰, 태블릿, 랩톱부터 헤드폰, 워치와 같은 웨어러블까지 - 전자기기를 구독 형태로 빌려주고 반납받는 서비스다. 기존 렌탈사가 금융 이자에서 수익을 내는 것과 달리, 폰고는 기기를 반납받은 뒤 해외 시장에서 재판매할 때의 예상 수익까지 구독료에 반영한다. 미래의 되팔 가격을 현재의 할인으로 녹이는 방식이다.

폰고에는 '못난이 상품관'이라는 코너가 있다. 외관에 미세한 흠집이 있는 기기를 더 저렴하게 빌려주는 곳이다. 기자도 그곳에서 맥북 하나를 고민한 적이 있다. 새 제품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성능 차이는 없었다. 박민진이 말한 '중고와 새것의 내구성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경험이, 서비스 하나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렌탈을 돌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문제가 보였다. 기업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유휴 IT 자산을 처리하는 건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다. 리고(reGO)는 이 지점을 파고 들었다. 담당자가 직접 수량을 파악하거나 포장할 필요 없이, 전문가가 방문해 실사부터 수거까지 전 과정을 대행한다.

단순 매입을 넘어 투명성도 확보했다. 모든 처리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타 업체와의 비교견적으로 자산 가치를 증명한다. 특히 데이터 영구 삭제 후 파기 인증서를 발행해 보안 리스크를 완벽히 해소한다. 이렇게 회수한 기기는 국내보다 시세가 높은 해외 시장에 직접 매각하거나, 폰고(phoneGO)의 렌탈 자산으로 재투입되어 자원의 순환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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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두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쌓인 방대한 거래 데이터는, 세 번째 사업인 리고트레이드(reGO Trade)의 씨앗이 됐다. 전 세계 중고 IT 기기의 시세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국가 간 가격 차이, 즉 아비트라지(Arbitrage) 기회를 포착하는 엔진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나라에서 60만 원에 거래되는 특정 기기가 그 시점에 다른 나라에서는 얼마에 거래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입니다."

리고트레이드는 현재 개발을 마치고 전 세계 바이어들이 본격적으로 온보딩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이 엔진을 통해 폰고의 구독료는 더욱 정밀하게 산정되고, 리고가 매입한 기기는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장으로 자동 연결된다. 데이터가 흐르며 세 서비스가 하나의 완벽한 순환을 이루는 구조가 비로소 현실화된 것이다.

국내에도 렌탈을 잘하는 플레이어는 많고, 중고 거래 시장에는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가 있다. 박민진은 그들과 같은 경기장에서 겨루려 하지 않았다.

"렌탈과 중고 거래는 결국 단권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한 번 사거나 한 번 팔면 거래가 끝납니다. 렌탈도 사이클이 좀 더 길 뿐, 반납하면 끝나는 구조예요."

피에로컴퍼니가 보는 것은 단건이 아니라 순환이다. 사서 빌려주고, 반납받아 되팔고, 그 과정에서 등급·시세·수급 데이터를 축적한다. 데이터가 쌓이면 AI가 학습한다. 특정 기기가 언제, 어디서, 얼마의 가치를 갖게 될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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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지 끼고 있던 두 손이 풀렸다. 이 사이클에서 데이터의 무게를 체감한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터졌을 때, 애플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공식적으로 아이폰 공급이 끊겼습니다. 하지만 수요는 여전했죠. 결국 비공식적인 경로로 유입된 아이폰은 정상가의 2배에 달하는 가격에 거래됐습니다. 동일한 기기인데, 전쟁이라는 변수 하나가 가격을 순식간에 뒤흔든 겁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었다. 2021년 터키의 리라화 가치가 폭락했을 때다. 달러나 유로를 가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터키의 아이폰은 하루아침에 '반값'이 됐다. 이들은 환율 차익을 노리고 애플 스토어로 몰려가 제품을 싹쓸이했다. 당시 애플은 가격 변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온라인 판매를 중단하기도 했다. 박민진 대표는 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본질을 봤다. 전자기기의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전쟁, 환율, 국제정세와 같은 거시적 변수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친다는 것. 그는 이 예측 불가능한 변동성 속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이런 현상들을 겪으며 확신했습니다. 국가별, 시점별 가격 차이를 정량적인 데이터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만 있다면, 잠자는 IT 자산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끌어낼 수 있겠다고요. 저희의 아비트라지 엔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이것을 정량적으로, 숫자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전자기기에도 생애 주기가 있다. 렌탈 사업의 생명은 잔존 가치와 감가상각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있다. 거시 환경에 따라 동일한 기기의 잔존 가치가 요동치는 현실을 몸으로 겪으면서, '거래를 성사시키자'에서 '데이터를 쌓자'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피에로컴퍼니가 유통 회사에서 데이터 기업으로 자기 정체를 바꾼 지점이다.

그 전환이 가속된 것이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KSGC) 과정이었다. KSGC는 해외 유망 창업 기업을 발굴해 국내 액셀러레이팅을 지원하고 국내 창업생태계에 정착을 돕는 중소벤처기업부의 글로벌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다. 글로벌 아비트라지라는 비즈니스의 뼈대는 그대로 두되,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집중하던 시선을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거래 데이터를 수집하고 학습시키는 쪽으로 옮겼다. 노동 집약적 무역업에서 기술 집약적 데이터 기업으로.

그 전환을 설명하면서 박민진이 꺼낸 비유가 있다.

"누구나 집에 안 쓰는 전자기기가 한두 대씩은 있거든요. 고장 나서 방치된 게 아니라, 새 기기를 사면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더 많아요. 기업이나 기관 단위로 넘어가면 그 가치는 천문학적입니다."

잠시 멈췄다.

"저는 이런 자원들을 캐지 않는 광산이라 생각합니다. 이 자원들의 가동률과 회수율을 높이려면, 결국 데이터로 연결해야 됩니다."

캐지 않는 광산. 아무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 쌓여만 가는 것들. 캐려면 곡괭이가 아니라 데이터가 필요하다. 기술 용어로 포장하기 전에, 본질을 이미지로 먼저 그린 것이다.

'도시광산'이라는 말이 있다. 버려지는 전자기기에서 금속과 희토류를 추출해 재활용하는 산업이다. 한국은 이런 광물의 수입 의존도가 OECD 최상위권이다. 박민진이 말하는 광산은 도시광산보다 한 단계 앞이다. 버리기 전에 돌리자는 것. 폐기물이 되기 전에 가치를 찾자는 것. 그는 자원 추출 연구 기관과의 협력도 모색해왔다. 수익이 크게 없어도 손해만 안 보면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속도가 빨라졌다.

구조는 깔끔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서 이것이 작동하기까지, 예상 밖의 벽이 있었다.

한국 기업들이 IT 기기 처분을 의사결정하기까지의 심리적·조직적 장벽. 기술이나 규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비용 절감에는 민감하면서 기기 처분은 끝없이 미루는 기업들. 보안 리스크와 내부 책임 문제가 겹치면, 아무리 합리적인 조건을 내밀어도 결재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서명해서 내보낸 기기에서 데이터가 유출되면?' 그 리스크를 떠안을 사람은 없다.

피에로컴퍼니의 대응은 의외로 소박했다. 더 좋은 가격 대신, 결재를 올릴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줬다. 데이터 삭제 과정, 검수, 자산 이동 경로를 단계별로 시각화해 내부 감사에 바로 쓸 수 있는 보고서를 제공한 것이다. 폰고와 연계하면 '처분까지 포함된 도입 구조'가 되어, 들여놓는 순간부터 내보내는 순간까지 하나의 의사결정으로 묶인다.

더 나은 조건보다 결재의 논리를 만들어주는 편이 빨랐다. 가격표가 아니라 품의서를 들고 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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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주요 시장으로 봤다. 기기를 사고파는 곳. 그런데 거래가 반복되고 데이터가 쌓이면서, 한국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한국은 IT 기기 교체 주기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장 중 하나다. 기업 거래 데이터의 신뢰도가 높다. 실거래 데이터가 빠르고 두텁게 쌓인다. 여기에 원화 약세가 겹치면, 한국에서 확보한 기기를 해외로 보낼 때 가격 차이에 환차익까지 얹힌다.

박민진은 한국을, 매출을 올리는 시장이 아니라 시세 예측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이터 허브로 재정의했다. 시장에서 허브로. 이 전환은 회사의 체질까지 바꿨다. 외주에 의존하지 않고 기술을 내재화하기로 했다. 데이터를 직접 다루고 제품화할 수 있는 개발 인력을, 한국 팀을 중심으로 확충하고 있다.

글로벌 아비트라지라는 말은 세련되게 들린다. 현실은 24시간이 모자라는 업무 사이클이다.

한국에서 소싱하는 시간은 낮. 북미로 판매하는 시간은 밤. 겹치지 않는다. 의사결정이 밀리고, 리더가 하루를 꼬박 깨어 있어야 하는 날이 반복된다.

시차는 단순한 시간 차이가 아니었다. 소통의 골든타임을 매번 놓치게 만드는 구조적 장벽이었다.

그래서 같은 길을 걸을 후배 창업자들에게 전하는 말은 단호했다. "한국을 단순히 '확장할 시장'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본진'으로 생각하고 올인하라." 원격으로 한국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창업자가 이곳에 상주하며 즉각적으로 움직여야, 이 시장의 역동성이 비로소 동력이 된다. 캐나다에서 건너와 강남에 본진을 꾸린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 사이 바깥의 시선이 달라졌다. 하루아침은 아니었다. 초기에 박민진이 원한 것은 투자금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투자심사역의 눈에도 이 사업이 가능성 있다는 확인. 꼭 합류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네 번 떨어졌다. 다섯 번째에 문이 열렸고, 그때부터 물꼬가 트였다. 중소벤처기업부 TIPS에 선정됐고, 올해 1월에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스파크랩(SparkLab)과 씨엔티테크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한국투자증권과 상장 주관사 계약도 맺었다. 누적 1만여 대의 기기를 돌리며 쌓은 데이터가, 비로소 숫자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지사 설립. 작년 대비 3배 이상의 매출 성장. 남은 과제는 선명하다.

그런데 1년 뒤의 성공을 물었을 때, 박민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꼭 저희 기업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각 가정이나 기업, 기관에서 방치되어 유휴되고 있는 자산들이 절반 정도로 줄었으면 좋겠어요."

잠깐 말을 고르는 듯했다. 피에로컴퍼니가 그 일에 기여하는 이름으로 거론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투자와 상장과 3배 성장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자기 회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50년 된 건물 꼭대기 층을 떠올렸다.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의미가 있겠다던 그때의 마음이, 투자 유치와 해외 진출이라는 단어들 사이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광산은 여전히, 대부분 캐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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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문선(english@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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