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필립(왼쪽). 1937년 할리우드 영화 '상하이의 딸' 출연 장면. |
1959년 3월 12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장남이자 23년 차 미 할리우드 배우 안필립(1905~1978)은 혼자서 한국을 찾았다. 첫 고국 방문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산 적도 없지만 조국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영식이며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유일한 할리우드 배우인 필리ㅍ·안 씨가 12일 누구의 마중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고국을 찾아왔다. 생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는 감격적인 정회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국의 땅을 디디는 그 순간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푸른 바다가 한반도를 뒤감고 있는 상공에 이르렀을 때 원로의 피로는 어느덧 사라지고… 꿈에 그리던 고국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에 정신을 못 차렸다.””(1959년 3월 14일 자 3면)
1959년 3월 14일자 3면. |
안필립은 18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난 후 조선일보 기자와 다시 인터뷰했다. 당초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한인들은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적극 응원했다고 회고했다.
“처음 영화배우가 될 생각을 하였을 때 이웃 한인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안 선생님의 자제가 어떻게 광대 노릇을 하겠단 말이요!’ 하고 모두 나무라는 바람에 한때는 낙망도 하였으나 막상 아버지께 그 뜻을 여쭈었더니 ‘영화도 훌륭한 예술이다. 정말 네 뜻이 그렇다면 왜 못 한단 말이야. 다만 제일류(第一流)의 영화배우만 되어라’ 하고 오히려 격려를 하여 주셔서 용약(勇躍) 은막계에 투신하였다.”(1959년 3월 19일 자 2면)
1959년 3월 19일자 2면. |
“내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눈에는 죄 많은 사람일 것이다. 나이 어린 너에게 온 가족을 의탁하고 떠나다니라고. 그때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만…”(1961년 12월 25일 자 2면)
1961년 12월 25일자 2면. |
재산 한 푼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도 했다. 하지만 2년 전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 나서 아버지가 돈보다 더 위대한 것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재작년 3월 내가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가 많은 사람들이 안도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주고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을 때 아버님은 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나에게 남겨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울었습니다.”(1961년 12월 25일 자 2면)
안필립은 어머니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결혼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혼할 만한 나이 때는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하느라고 결혼 못했고, 이제 동생들이 다 자리잡고 나니까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결혼 못하게 됐다.”(1968년 3월 17일자 4면)
1967년 5월 14일자 6면. |
안필립은 최소 7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59년에 이어 1962년, 1963년, 1967년, 1968년, 1971년, 1974년이다. 그때마다 인터뷰 또는 동정 기사가 실렸다. 할리우드에서의 활동, 한국 영화계 인사와 교류, 서울 강남(도산공원)에 이장한 아버지·어머니 묘소에 참배했다.
안필립은 1934년 배우로 데뷔해 중국인 하인, 일본인 장교, 홍콩인 시민 같은 아시아인 역할로 영화 및 TV 드라마 300여편에 출연했다. 한국계 배우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새겼다.
2021년 4월 2일자 A23면. |
2021년 4월 미 연방정부 기관인 국가인도기금(NEH)은 안필립과 동생 안수산·안필영이 함께 찍은 사진을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올렸다. 삼남매가 미군으로 복무하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가 잇따르자 화합의 상징으로 내세웠다는 해석이 나왔다.(2021년 4월 2일 자 A23면)
2021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할리우드 배우 생활을 하던 1938년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 등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였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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