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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빅뱅 같은 일출을 줄게[여행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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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동아일보

전남 장흥군 억불산 정상에서 바라본 득량만 일출. 구름과 수평선 사이로 태양이 강렬한 빛을 퍼뜨리자 득량도와 섬들, 그 너머 고흥반도 모습이 태초의 순간을 상상케 한다.


휴대전화 손전등에 의지해 새벽 산 중턱 오솔길을 오른다. 전날 구름과 안개가 잔뜩 꼈다. 걱정이 화선지에 먹물 배듯 가슴 한쪽으로 스며든다. 전남 장흥군 장흥읍 천문과학관 주차장까지는 차로 올라왔다. 해발 약 260m. 정상까지 이만큼을 걸어가야 한다. 급경사가 아닌데도 조바심에 숨이 조금씩 차오른다. 고개를 위로 꺾어 어둠이 물러나지 않는 하늘을 훔쳐본다. 하얗고 노랗고 푸른 별들을 내가 머리에 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구름 이불에 여전히 덮여 있는 걸까. 길이 서서히 가팔라진다. 사위는 슬금슬금 뽀얘진다. 지그재그 데크 길이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정상. 해발 518m 억불산(億佛山)이다. 몸을 빙 돌려 사방을 본다. 참 좋다.

● 그 일출, 끓며 넘치며

동남쪽 멀리 득량만(得糧灣)이 보인다. 장흥 출신 소설가 이승우는 한 작품에서 이런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이 ‘자신의 품을 활짝 열어 옷자락 속에 품고 있던 바다를 꺼내 보인 것처럼 여겨졌다.’

구름 장막은 다 걷히지 않았다. 득량만 바다와 섬들 위로 몸을 막 일으킨 해가 그 틈새로 노랗다가 불그스름하다가 벌겋다가 시뻘건 색을 드러낸다. 빛이 용암처럼 끈적거리듯 퍼진다. 역광을 받아 어두운 구름층과 수평선 사이 좁고 평행한 공간에 붉은 우리은하가 생긴 듯하다. 득량도와 그 너머 고흥반도가 태초의 땅처럼 신비롭고 아득하다. 빅뱅 순간이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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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바라본 억불산 정상. 장흥평야를 비롯해 장흥군 북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경록 작가 제공.


시선을 육지로 돌리니 장흥 북쪽 태반이 드러난다.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억불산 자락 끝에서 장흥평야가 동서로 뻗어 있다. 그 주위를 동북쪽부터 사자산, 제암산이 감싸안고 서쪽으로 용두산과 수인산까지 내달린다.

다시 남으로 고개를 향한다. 능선이 아낙네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사방으로 펼쳐지듯 내려온다고 해서 억부산(億婦山)으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역시 그렇다. 그 너머로 언덕 같은 산들이 구불구불 점점 낮아지며 끝내는 바다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궁금해진다. 저것은 산줄기가 바다로 내려간 것이냐, 섬 줄기가 뭍으로 올라온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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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은 산줄기가 득량만으로 들어간 것인가, 섬 줄기가 뭍으로 올라온 것인가.


어쩌면 둘 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땅과 물이 만나 서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만나서 소통했다는 얘기다. 즉, 회통(會通)이다. 서로 모순돼 보이는 것들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 비록 설익고 억지스럽지만, 억불산에서 깨달은 이 이치를 장흥 곳곳에서 마주치게 될 터였다.

● ‘보배로운 숲’에서 소통을 느끼다

그 깨달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보림사(寶林寺)다. ‘왜 달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느냐.’ 깨침은 경전(손가락)이 아니라 불성을 지닌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는 선불교(선종)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이 땅에 퍼졌다. 9산선문이다.

그중 가장 먼저 오늘날 조계종을 연 승려가 도의(道義)다. 보림사는 도의선사가 개창(開創)하고 그의 3대 법손(法孫)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실질적으로 문을 열었다(이일야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조계종출판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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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대적광전과 그 앞에 좌우로 서 있는 통일신라 남·북 삼층석탑과 석등.


부처를 모신 금당 앞에 좌우로 탑을 하나씩 세운 보림사 가람 배치는 예사롭지 않다. 그전까지는 1탑 1금당 배치가 주였다. 이 방식은 금당을 가로막는 탑이 중심으로 보이다. 반면 보림사처럼 좌우로 분산된 쌍탑식은 금당의 중요성을 부각한다(김봉렬 ‘불교건축’, 솔, 2004).

그런데 보림사 금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비로자나불은 선종과 대립하던 교종 중 ‘화엄경’을 근본으로 삼는 화엄종 부처다. 모순된 두 사상이 만나 하나를 지향하는 회통이다. 인간 본질은 부처라는 선종과 인간을 비롯한 온 세계가 불성의 현현(顯現)이라는 화엄종은 모두 ‘본래 부처’라는 생각에서 통한다(‘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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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대적광전에 모신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앞에서 한 승려가 독경하고 있다.


경내 모든 불당은 6·25전쟁 때 타버려 1980년대 이후 지었다. 아쉬움은 귀중한 유물로 보상받는다. 통일신라 이후 탑 가운데 아주 드물게 상륜부가 완벽히 남은 남·북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대표적이다. 모두 국보다.

철로 만든 불상은 국내에 몇 없다. 높이 252cm, 약 1.5t의 철이 들어간 불상은 도금하지 않아 표면이 거칠고 투박하다. 더 인간적이다. 대적광전 마룻바닥에 앉아 지그시 바라본다. 고동색 철불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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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를 품에 안은 가지산 줄기들이 연꽃 모양을 닯았다. GNC21 제공


보림사는 비자나무 숲 우거진 가지산 품에 안겨 있다. 동쪽에서 바라보면 그 산줄기들이 연꽃 모양을 닮았다.

● 매생이, 김, 굴

2년 전 장흥을 처음 찾았을 때도, 이번에도 첫날 점심은 굴구이였다. 드럼통을 30cm 높이로 잘라 철판을 얹고 그 위에 굴을 좍 깐다. 익으면 껍질이 살짝 벌어진다. 목장갑 낀 손으로 잡고 열어젖히면 매끄러운 굴 살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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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굴구이. GNC21 제공


굴구이 집에서는 매생이국이나 매생이떡국을 판다. 매생이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김 양식의 천덕꾸러기였다. 김 홀씨가 붙어 자라는 김발에 매생이가 자꾸 붙었다.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야 하니 귀찮고 고된 일이었다. 김과 매생이는 서로 모순이었다. 그러나 매생이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매생이를 기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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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생이떡국. GNC21 제공


남해안 어느 지역이 김 양식을 하지 않겠느냐만, 장흥에서는 좀 다른 김도 난다. 김 양식을 할 때는 바닷속 이물질이 들러붙지 않도록 산(酸)을 뿌린다고 한다. 그런데 산을 뿌리는 대신 썰물 때마다 김발을 뒤집으며 태양으로 이물질을 없앤다. 무산(無酸)김이다.

해산물 양식은 종류에 따라 기르는 수심이 다르다. 매생이, 김, 미역, 굴 순으로 깊어진다. 같은 바닷물이라도 깊이에 따라 길러내는 산물이 다르다. 그런 차이가 양식이라는 틀로 한데 묶여 밥상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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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삼합. 소고기와 피조개 관자, 표고버섯의 3위 1체다. GNC21 제공


다른 것을 하나로 통하게 한 음식이라면 ‘장흥 삼합’도 빠질 수 없다. 장흥 한우와 키조개 관자 그리고 표고버섯을 구워 고기, 관자, 버섯 한 점씩 쌓아 한입에 넣는다. 관자와 버섯을 육수에 적셔 조리하는 집도 있다. 잘 어울릴까 싶은데 묘하게 조화롭다.

● 섬을 핥는 바다 소리

지방 소도시에 이른바 힐링 치유 또는 웰니스 증진을 표방하는 시설이 늘고 있다.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재정 지원하는 사업이다. 스트레스 검사를 비롯한 건강검진, 명상이나 요가, 한방 족욕, 마사지 테라피 등을 받을 수 있다. 산이나 바다 기운도 받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는다. 장흥에도 힐링테라피센터와 원광대 장흥통합의료병원 마음건강치유센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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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힐링테라피센터 족욕실. GNC21 제공


솔직히 난데없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사람이 올까 했는데 군민들이 꽤 온다고 한다. 관광객 같은 외지인에게도 열려 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는 만나서 소통할 공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억불산 전날 일출로 유명한 소등섬을 찾았다. 일몰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때를 못 맞췄다. 썰물이어서 소등섬은 갯벌에 ‘박혀’ 있었다. 장흥이 낳은 원로 작가 한승원은 고향 바닷가를 작품 배경으로 많이 삼았다. 한 단편에서 그는 ‘파도가 돌담을 핥을 때는 사르륵 소리가 난다’고 했다. 바닷물이 소등섬을 핥고 지날 때는 어떤 소리가 날까. 일출도 일출이지만 다음에는 그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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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일출 명소 소등섬. 썰물 때여서 갯벌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됐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으로 선을 그으면 장흥 남쪽 해안 높이 46m 전망대 ‘126타워’에 닿는다. 광화문, 러시아 하얼빈을 잇는 동경 126도 선상에 있다는 의미에 더해 한(1)민족, 두(2) 나라를 소통 화해 교류 협력 평화 기회라는 6대 가치로 통일하자는 뜻이란다. ‘굳이 여기에?’라고 생각했다가, 이승우 단편 ‘정남진행’ 속 문장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남진. 한반도가 큰 나무라면 수분을 공급받기 위해 뿌리 내리고 있는 물이 그곳 바다인 셈이야.’

글·사진 장흥=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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