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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녀를 이따위로 만들었다고?” 욕 많이 먹었는데…숨겨진, 서글픈 뒷이야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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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마리 반 괴템 & 에드가 드가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된 ‘영원의 소녀’
서글픈 삶, 차츰 옅어진 미스터리 생애
헤럴드경제

에드가 드가, 더 스타(일부 확대), 1876~1877, 파스텔, 58x42cm, 오르세 미술관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원숭이 같은 예술” 쏟아진 비판
헤럴드경제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보에이만스 판 뷔닝언 박물관 [Artshooter - Kleine Danseres, 위키미디어, CC BY-SA 2.0]



에드가 드가가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를 보였을 때 행사장은 술렁였다.

그곳에는 어린 소녀상이 있었다. 실제 사람 머리칼로 엮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진짜 보디스(bodice)와 튀튀(tutu)를 입고, 가게에서 파는 발레 슈즈까지 신고 있었다. 그것은 두 팔을 팽팽하게 당긴 채, 곧 핑그르르 돌 듯 다리를 내민 자세를 취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턱을 살짝 든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은 흐릿했다. 낮은 코와 마른 몸, 어깨는 좁고, 허벅지는 빈약했다. 이는 운동으로 다듬어진 게 아닌, 굶주림이 빚어낸 몸의 곡선 같았다. 조각상의 이러한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고, 서글펐다. 실제 피부색과 비슷한 밀랍으로 빚어서일까. 작품은 묘한 기시감도 풍겼다. 깔끔한 외모, 탄탄한 몸매 등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조각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 눈에 이 작업물은 예술은커녕, 그저 초토화된 무언가에 불과해보였다.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신랄한 악평이 몰아쳤다. 작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등 일부는 “가장 현대적인 시도”라는 찬사를 하긴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타락의 꽃”, “악덕과 혐오”, “흉악한 분위기” 등 신랄한 비난에 맥없이 묻혔다. 문제의 작품이 유리장에 있어서였을까. 하다 하다 “악취미로 빚은 인체 표본”이라는, 그런 폭언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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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AgnosticPreachersKid, 위키미디어, CC BY-SA 4.0]



드가는 소녀상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 구석에 둔 옷장 문을 열고, 안쪽 깊숙하게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그는 이를 다시는 대중 앞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는 이대로 영영 어둠에 잠겼을까. 거기에 얽힌 모든 사연도 그렇게 끝을 맺는가. 그럴 리 없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는 한 소녀의 삶을 따라간다. 이름은 마리 반 괴템. 작품의 모델로 나선 발레 무용수였다.

무용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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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무용 수업, 1879, 캔버스에 유채, 38x88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마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릎에 힘을 줬다. 허벅지를 돌리고, 양발의 뒤꿈치를 맞붙였다. 이는 발레의 기본 동작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대로 팔을 뻗어봤다. 하품이 길게 나왔다. 마른 등뼈가 선명히 보였다. 코끝으로 송진(松津) 가루가 맴돌았다. 묵직하고도 톡 쏘는 향이었다. 이 냄새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아니었다. 끈적거리는 느낌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해가 떨어질수록 공기는 눅진해졌다. 권태로운 나날이었다.

1878년, 마리는 열세 살이 된 그해에 파리 오페라 무용 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곧 파리 오페라 발레단(Paris Opera Ballet)에 들어갔고, 얼마 안 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다. 관람석에는 늘 사람이 가득했다. 이들은 수시로 휘파람을 불었다. 공연은 3~4시간씩 이어질 때도 있었다. 이 긴 행사가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이들 또한 많았다. 멀찍이 선 직원에게 손짓하고선, 심각한 이야기를 흘리는 양 귓속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리는 벌써 팬과 평론가를 몰고 다니는 영재 소녀 같다. 하지만 실상은….

파리에서 가장 어수선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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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발레 수업, 1874, 캔버스에 유채, 83.2x76.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리는 무대 위에서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마리는 하급 발레 무용수였다. 조명 뒤 소품처럼 선 존재 중 한 명이었다. 마리 같은 소녀는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이들은 많고, 빈약하고, 하찮다고 해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통칭되곤 했다.

마리는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벨기에계 이민자였다. 아버지는 재봉사였다. 어머니는 딱히 직업이 없었다. 위로는 큰 언니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이어 한 살 많은 작은 언니도 있었지만, 출생하고 열여드레 만에 사망했다. 불결한 위생 등이 문제였을 것이다. 마리 밑으로는 다섯 살 어린 여동생 샤를로트가 따라왔다. 이들의 터전은 9구. 그곳은 파리에서 가장 어수선한 땅이었다. 자유분방한 부자와 방황하는 거지, 목쉰 상인과 목 아픈 술꾼, 동전 소리를 내는 노동자와 매춘부가 불룩하게 모여사는 구역이었다. 건물 틈으로 깨진 창문, 토끼 굴보다 못한 방, 좁은 여관과 더러운 페인트 가게, 스러진 야심과 불행한 음악이 덕지덕지 붙은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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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더 스타, 1879~1881, 73.3x57.4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마리는 언니, 동생과 함께 먼지를 파헤치며 컸다.

땀에 절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자랐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벨기에로 혼자 떠났다는 설도 있다). 어머니가 세탁 일에 나섰다. 돈벌이는 역시나 시원치 않았다. 방값이 몇 달씩 밀려 쫓겨나듯 이사도 자주 갔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은 갈수록 좁고, 위태로워졌다.

마리가 어릴 적부터 무용 학교에 들어간 건, 이런 이유 탓이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재능? 그런 드라마가 아닌, 돈벌이 때문이었다.

부모가 먼저 찾아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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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오페라 오케스트라, 1870년경, 캔버스에 유채, 56.5x45m, 오르세 미술관



19세기 당시 프랑스 파리는 분명 예술의 도시였다.

빼입은 부자, 그리고 이들을 흉내 내는 중산층은 누구든 예술에 대해 자기 철학을 말할 수 있었다. 접이식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미술과 무용을 토론하고, 자수 손수건을 펼치며 음악과 문학 이야기를 하는 일은 흔한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파리의 밤, 그러니까, 파리가 환락(歡樂)의 도시로 표정을 바꿀 때 나타나는 풍경이었다. 호메로스부터 에밀 졸라, 기드 모파상을 논하던 이들은 하나둘 카바레와 오페라 극장 등으로 모였다. 슬쩍 눈인사를 하곤, 모두가 눈치껏 자기 자리를 잡았다. 그다음 단추를 풀고 즐긴 게 마리와 같은 ‘작은 쥐’ 무희가 우르르 등장하는 공연들이었다. 이 또한 그 시절의 흔한 광경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밤 문화’ 생활이 감상에서 끝나지 않을 때가 잦았다는 점이었다. 다수의 관객은 무용수를 봤다. 정확히는, 무용수만 봤다. 춤과 음악에 관심을 두는 척, 실제로는 무용수의 얼굴과 몸 곡선을 탐닉하기에 여념 없었다. 공연 직후 사람을 불러 귓속말을 하는 이들? 알고 보면 이런 요청을 하고 있을 터였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있던 그 발레 무용수를 불러 달라고. 그뿐인가. 돈 있는 사람들은 무대 뒤, 무용수가 드나드는 복도와 휴게실, 송진 가루가 날리는 연습실까지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에게 그곳은 만남과 거래의 장소였다. 거기서 선택된 아이는 얼마의 돈을 받았다. 그리고, 때로는 이 자의 하룻밤 연인 또는 뮤즈로 함께 도시를 거닐기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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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발레 리허설, 1874, 54.3x73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러니까 말이 후원이지, 상당수 경우는 매춘 거래와 다를 바 없었다.

알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봄을 사는 인간, 봄을 파는 소녀, 경찰, 행정부, 심지어 소녀의 부모까지. 경찰과 행정부는 눈을 감았다. 부모는 외려 먼저 나서서 상류층 인사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 또한 돈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였다. 복지제도 따위 구멍이 숭숭 뚫린 그 시절, 당시 빈민층이 동전을 모을 방법은 많지 않았다. 소년은 광산과 농장으로 갔다. 소녀는 공장이나 무대를 찾아야 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주일 중 6일, 하루 10~12시간씩 일을 하든, 연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어떻게든 얼굴과 몸통, 팔과 다리를 내어주고, 이에 따른 ‘몸값’을 받는 식이었다. 도시는 눈부셨다. 하지만 빛은 공평하지 않았다. 빛은 그때에도 사람을 봐가며 온기를 쬐고 있었다.

무용수와 예술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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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1886, 캔버스에 유채, 76x82cm, 오르세 미술관



1878년께. 마리는 열세 살 무렵에 드가와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드가는 사십 대 중반이었다. 나이 차는 서른 살 이상이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출신의 잔뼈 굵은 화가 겸 조각가였다. 특히나 데생에 있어서는 동시대 견줄 이가 없을 만큼의 실력자였다. 드가가 그린 건 무희와 세탁부, 모자 장수 등 그 시절의 ‘낮은 곳’ 사람들이었다. 목욕하는 댄서, 하품하는 세탁부, 권태로운 모자 장수 등 이들 삶의 무심한 장면들이었다. 그런 그가 특히나 화폭에 자주 옮겨 담은 건 무용수였다. 종이를 든 채 오페라 극장과 무용 학교, 연습실 등을 지겹도록 오갔다. 확실히 잘 그리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 예쁘게 그리지는 않았다. 얼굴은 흐릿하고, 표정은 희미했다. 우아하게 들어올리는 팔과 다리 동작 또한 흐리멍덩하게 표현하는 식이었다. 여성 혐오자. 자기 모친의 불륜을 트라우마로 안고 사는 사람. 여자를 못생기게 그려 그 기억에 복수하는 한편, 집안이 기운 탓에 그나마 팔리는 무용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인간. 드가에게는 이처럼 묘한 소문도 따라붙었다. 이 남자는 얼굴도 좋지 않았다. 늘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다. 말은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허세를 부리며 투덜대기 일쑤였다. 여러모로 피곤해보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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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두 여인, 1878~1880, 파스텔화, 29.2x44.4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너, 9지구에 사는 그 꼬마 맞지?”

드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리예요.” 마리가 답했다. “우리 종종 봤지?” 드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마리는 또 답했다. 사실이었다. 마리의 집과 드가의 작업실 사이 거리는 고작 몇 블록이었으니. 부은 몸을 이끌고 극장 또는 학원으로 가는 마리는, 드가의 뚱한 표정과도 몇 번은 마주한 적이 있었다. “너, 내 모델이 돼주렴.” 드가가 말했다. 그는 턱을 치켜들었다. 눈동자는 애먼 바닥을 훑었다. “좋아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이 든 남자야 익숙했기에.

그저 데생과 조각만 반복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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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1895년경



멍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든, 그 순간 마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리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를 위해 몸을 뻗었을 때 말이다. 눈 감은 어둠에서 펼쳐진 건 몇 푼짜리 고민 따위 필요없는 별세상이었을까. 어머니와 동생의 내일, 가면 쓴 남자와 조명 밑 여자의 관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딴 세계였을까. 드가는 마리를 3년가량 꾸준히 봤다. 마리 앞에서 진득하게 선을 긋고, 끈질기게 밀랍을 빚었다. 드가는 그때도 별말이 없었다. 요즘 젊은 예술가는 겉멋만 있다는 둥, 종종 험담 비슷한 혼잣말을 하는 정도였다. “가만히.” 그래도 턱이 무거워질 때, 종아리가 저려올 때면 귀신같이 나사를 조였다. 드가는 마리에게 4시간당 6~10프랑 사이 사례비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육점 고기 한 근이 1~2프랑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

드가와 그녀는 화가와 모델 이상의 어떠한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저 몇 걸음 떨어진 채, 지겹도록 데생과 조각만 반복할 뿐.

“조각상, 상태 나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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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다시 1881년, <열네 살의 어린 무희> 에 혹평이 빗발친 그날.

드가는 진심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마리를 통해 무언가 전하려고 한 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드가는 그저 자신의 조각 실력을 모욕당했다고 여겨 화가 났을까. 여성 혐오자의 시선으로 빚은 신랄한 조각상에 사람들이 같이 공감하지 않아 성질을 부렸을까. 그게 아니면… 어쩌면 약하고, 돈 없고, 불행한 꼬마 무용수의 생생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분노를 느낀 건 아니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사실, 드가가 진정으로 여성을 싫어한 게 맞는지는 지금도 토론으로 이어지는 소재다. 앞서 언급했듯 정말 미워했으니 그림과 조각 모두 일그러뜨렸다는 말도 있다. 그런 한편, 이들의 불합리한 일상을 세상에 생생히 고발하기 위해 ‘일부러’ 꾸밈과 보정을 버렸다는 해석도 있다.

소녀상은 훗날 드가가 죽은 1917년 이후 그의 작업실 구석에서 발견된다.

드가의 동료 화가였던 메리 카사트는 “조각상, 상태 나쁨”이라고 쓴다. 드가의 전기 작가인 폴 르퐁은 밀랍 상태를 두고 “폐허가 됐다”는 표현을 남긴다. 그나마 틀이 남아있는 게 다행이었다.

차츰 흐릿해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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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오른쪽을 향해 앉아있는 무용수, 1873, 오르세 미술관



마리 또한 조각상으로 곤욕을 치렀다.

마리는 졸지에 그녀 또한 ‘원숭이 소녀’라는 조롱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쥐에 이어 원숭이, 타락의 꽃…. 그녀는 도통 자기 이름으로 불릴 틈이 없었다.

마리는 이후 발레를 더 이어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잘렸다. 조각상이 전시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녀와 오페라 발레단 사이에는 이미 몇 번의 충돌이 있었다. 지각과 불복종 등을 이유로 몇 차례 임금 삭감과 같은 징계도 받은 상태였다. 그랬던 마리는 어느 날부터 아예 모습을 감춰버렸다. 결석의 연속이었다. 해고는 이에 따른 결과였다. 그것은 드가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드가가 작업실에 계속 붙잡아둔 탓에 제때 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 무렵 마리가 절도죄로 체포돼 출석할 수 없었다는 말 또한 나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마리가 퇴출당하기 몇 달 전, 신문 《레벤느망(L‘Evenement)》은 “(예술가의 모델)마리가 르 라 모르(Le Rat Mort) 등 주점을 자주 오간다”는 식의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그곳은 10대 소녀가 가기에 괜찮은 장소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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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무대 뒤 무용수들, 1876~1878



마리의 언니 앙투아네트는 손님 지갑을 뒤져 700프랑을 훔쳤다. 붙잡혀 감옥신세를 졌다. 전후로는 거리의 여인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생 샤를로트는 발레를 계속했다. 그 결과, 무용 학교의 교사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리는? 마리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세기 말 무렵의 프랑스면, 개인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기록도 없고, 흔적도 없다. 당연히 직업, 결혼 여부와 자식 유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현재로는 미스터리 영역에 있다.

마리의 삶에는 영광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인생은 비루하고, 참담했다. 누군가가 문장 한 줄 남겨주지 않을 만큼 처연했다. 하지만, 그런 마리를 본떠 빚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는 늦게나마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시대의 가장 사실적인 예술이라는 재평가 덕이었다. 지금은 복제품 최소 28점이 전 세계 곳곳에서 자세를 잡고 있다. 마리도 이 덕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글쎄라는 말이 나온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 열네 살의 소녀가 정말로 하고 바랐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딱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서 영원의 소녀가 된 일? 적어도 이것은 아니지 않았을지.

기자의 말풍선
헤럴드경제

[교보문고]



후암동 미술관의 <위험한 그림들>이 독자님들의 관심 덕에 베스트셀러 마크를 달 수 있었어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후암동 미술관은 다음 주 200회차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몇 년의 시간 사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응원해주신 데 대해서도 미리 감사를 표합니다.

참고자료
에드가 드가, 베른트 그로베, 마로니에북스

Kendall, Richard., Degas and the Little Dancer, Yale UP

Armstrong, Carol., Odd Man Out: Readings of the Work and Reputation of Edgar Degas. Chicago / Lond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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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더 스타, 1876~1877, 파스텔, 58x42cm,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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