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로맨스 판타지를 꿈꾸지만 그 세계관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마치 고추장 떡볶이 세대와 치즈 떡볶이 세대 간의 입맛처럼 말이죠. 저는 고추장 세대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치즈 세대의 감성을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 만화의 거장 이현세 작가가 웹툰 ‘블루엔젤 리부트’로 돌아왔다. 원작 ‘블루엔젤’이 단행본으로 나온 지 35년 만이다. 26일 서울 강남구 화실에서 만난 이 작가는 여러 작품 중에서도 블루엔젤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제 작품 중 유일한 여자 영웅이야기”라며 “속편격인 작품은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는 신조를 깬 첫 작품이기도 하다”고 그 의미를 전했다.
블루엔젤은 ‘공포의 외인구단(82년)’ ‘날아라 까치(83년)’ ‘아마게돈(88년)’ ‘남벌(95년)’ 함께 이 작가가 전성기 때 그린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잔혹한 범죄 현장을 누비는 강력계 여형사 하지란 경위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물로 당시 남성중심사회에서 파격적인 선택이란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스포츠신문에서 연재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91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뒤 영화로 기획되기도 했다.
“15년 전 일본여행을 갔다가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일본 만화가 모치츠키 미키야의 70년대 작품인 ‘와일드 7 리턴즈’를 만났다. 당시 작가의 나이가 73살이었는데, 독자들의 열열한 지지로 2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새롭게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언젠가 나도 일흔이 넘어서 독자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작품을 다시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올해 70살이 됐고, 그게 블루엔젤 리부트가 됐다.”
이번 작품은 그가 지난해 골수형성이상증후군(MDS) 진단을 받은 상황에서 마지막 웹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몰입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작품인 만큼 ‘블루엔젤 리부트’에 거는 기대도 컸다. 공개 첫 날인 지난 13일 카카오페이지 액션 랭킹 4위에 오르며 원작 세대인 50~70대부터 20~3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가는 “나이 든 작가라 그런지 ”올드하다“는 반응도 있지만 “그리웠다” “오래 기다렸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다”며 “웹툰의 특성상 젊은 독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생각”이라고 했다.
리부트는 은퇴 직전 죽음의 위기에서 젊음을 되찾은 ‘하지란’이 펼치는 화려한 복수극을 핵심 줄거리로 한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변화 뿐만 아니라 원작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구성된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원작에서 20대이던 하지란은 70대 할머니가 됐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젊음을 되찾는다. 이 작가는 “이미 원작을 보신 분들이라면 20대와 70대가 공존하는 주인공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봐주시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이 작가는 애독자들을 위해 “하지란은 ‘하도 지랄 같은 성격’을 줄여 ‘하지랄’이었던 것을 순화한 표현”이라며 주인공 이름에 얽힌 비하인드를 전했다. 또 몇 차례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불발된 이유로는 “국내엔 하지란을 연기할 적당한 배우가 없었다. 서양으로 치면 영화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 정도의 체격조건을 갖춘 여배우가 필요했는데, 결국 못찾았다”고 설명했다.
종이 만화책과 웹툰으로 구분되는 독자들의 세대차에 대해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판타지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 판타지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누구나 똑같다”는 답변으로 갈음했다. 이 작가는 “매일 매일 지옥으로 떨어지는 세상에서 노인은 노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의 판타지로 위로를 받고 있다”며 “과거에는 동양의 무협 판타지 세계관이었다면 요즘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을 즐긴다는 차이 정도다. 길 뿐이다. 나 또한 하지란처럼 신체적으로 70대 노인이 됐다는 차이만 있을 뿐 정신적으론 연재를 시작했을 30대 초반의 그 감정 그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과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최근 종이로 된 만화책이 다시 인기를 끄는 현상에 대해 반가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작가들은 돈은 웹툰으로 벌어도 종이책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한다”며 “여전히 종이 만화책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블루엔젤 리부트’의 출간 여부에 대해서는 “모든 창작물은 종이로 된 출판물이 나와야 제대로 된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때 아무리 잘나가던 만화가라 하더라도 시장이 찾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결정할 일이다. 리부트가 시즌 2로 이어지느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오는 8월 퇴임을 앞둔 그는 독자들에게 순수 작가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 작가는 지난 1996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부임해 30년간 후학 양성에 힘써왔다. 하일권, 정필원, 임리나가 그의 제자다. 그는 “그동안 훌륭한 후배들이 여럿 배출됐으니 이제 다시 온전한 작가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웹툰은 결국 ‘노가다’다. 체력을 보충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급하다”고 말했다.
현재 구상 중인 차기작은 ‘경주에 대한 이야기’라고 뀌뜸했다. 울진이나 포항 출신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가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낸 마음 속 고향은 경주다. “저에게는 흙먼지 속 경주의 추억이 있습니다. 유적지에 담벼락 조차 없던 시절 마애불은 논밭에 흩어져 있을 정도로 흔해 빠졌었고, 첨성대 옆 천년 숲 계림은 집 앞마당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진에는 없지만 그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영원히 그리운 개구쟁이 시절 경주를 만화로 그려낼 생각입니다. 그게 신라 역사일지, 집안 내력을 다룬 자전적인 이야기가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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