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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의 할리우드 리포트] 사랑이라는 이름의 표류 ‘퀸 앳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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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치매라는 질병이 가족의 울타리를 침범할 때, 우리는 흔히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랜스 해머 감독은 이 보편적인 믿음에 균열을 낸다. 2008년 데뷔작 ‘발라스트’로 최우수 감독상과 촬영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던 그가 17년의 침묵을 깨고 영화 ‘퀸 앳 씨’로 돌아왔다. 제7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돌봄’이라는 숭고한 성역 아래 가려진 잔인한 민낯을 서늘하리만치 정교하게 파헤친다.

영화 제목 ‘퀸 앳 씨’라는 표현은 중의적이다. 영국식 영어인 ‘바다 위에서(at Sea)’는 표류하며 길을 잃거나 혼란에 빠진 상태를 뜻한다. 여기에 거대한 전함 갤리온 위에서 전쟁터로 향하는 ‘여왕(Queen)’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랜스 해머 감독은 이 제목 하나로 치매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존엄을 지키려는 여성들의 투쟁을 역설적으로 압축해낸다.

영화는 치매가 깊어지는 아내 레슬리(안나 칼더 마샬)와 그녀를 끝까지 곁에서 돌보려는 두 번째 남편 마틴(톰 커트니), 그리고 노부부의 상황을 걱정하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딸 아만다(줄리엣 비노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아만다의 딸 사라(플로렌스 헌트)의 첫사랑 이야기가 교차되며 삶의 시작과 끝이라는 두 극단이 하나의 화면 위에 공존한다.

아둘로 벨로소 촬영감독은 노부부 레슬리와 마틴의 고착된 일상을 부동의 고정 카메라로, 사라의 에너지는 핸드헬드의 불안정한 움직임으로 대비시켰다. 그 사이를 유영하는 아만다는 두 세계의 충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완충지대다. 영화 전반부를 지배하는 ‘완벽한 돌봄’의 상태, 결벽에 가까운 하얀 색채는 후반부로 갈수록 푸른색과 초록색의 소용돌이로 물든다. 이는 인물들이 통제권을 잃고 감정의 바다로 휩쓸려가는 과정을 상징하는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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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압도적인 힘은 배우들의 연기다.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아만다’는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그녀를 지키려는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이물질처럼 겉돈다. 비노쉬는 아만다를 두고 “침몰해가는 배 위에서 모두가 무사한지 확인하며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어머니의 성적 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묻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보호이며, 의붓 아버지 마틴의 사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이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임을 설득해낸다.

레슬리 역의 안나 칼더 마샬의 고백은 울림이 깊다. 실제로 치매를 앓는 남편을 돌보고 있는 그녀는 “이 역할에 필요한 배경은 이미 내 삶 속에 충분히 있었다”며 담담히 진실을 새겨 넣었다. 톰 커트니 역시 마틴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마틴은 그 집의 계단, 식사 챙기기, 모든 일상적인 돌봄이 이미 자신의 능력을 넘어섰다는 걸 어쩌면 알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불행히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관객은 그보다 먼저 깨닫게 된다.

랜스 해머 감독은 마틴의 헌신을 단순히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때로 ‘집착’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도 외면하지 않는다. 마틴은 아내를 깊이 사랑하지만 좁고 가파른 계단, 매 끼니의 식사 등 돌봄은 이미 그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레슬리가 먼저 성 행위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정말 좋은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아만다에게 그 누구보다 냉철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혼자 행동해야 하는 짐을 지게 만든다. 자기결정권과 동의라는 문제를 영화의 중심에 놓고 누군가의 존엄이 질병에 의해, 혹은 가족이나 기관에 의해 언제 어떻게 빼앗기는가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감독의 철저한 현실 연구를 바탕으로 사회복지사, 의사, 요양 전문가들과 광범위한 워크숍을 거쳐 완성된 시나리오는 그 밀도만큼 묵직하게 관객을 짓누른다.

‘퀸 앳 씨’는 소화하기 힘든 영화다. 카타르시스도, 따뜻한 위로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잔인할 만큼 솔직한 질문 앞에서, 영화는 끝까지 대답을 유보하며 그 무게를 온전히 관객에게 건넨다.

/하은선 골든글로브 재단(GGF) 회원

문화부 sedailycultu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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