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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유비가 제갈량을 먼저 찾아간 게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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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번역된 ‘위략’의 기록 “제갈량이 찾아갔는데 유비는 본체만체했다”
조선일보

넷플릭스 드라마 '삼국지' 중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나는 장면.


“제갈량은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가서 (그와 처음) 만났다.”

“제갈량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유비는 (다른) 보통 유생을 대하듯이 그를 대우했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소린가? 현대에 쓴 소설인가? 아니다. 옛 역사서의 기록이다. 도대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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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와 제갈량의 첫 대면을 그린 상상화.


현대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고사성어 중에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있다. 임무출이 엮은 ‘사자성어 큰사전’은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풀을 엮은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돌아본다는 뜻으로, 유능한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여러 번 찾아가서 예(禮)를 다하거나, 참을성 있게 노력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한다. 후한 말, 유능한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한 유비는 여러 사람을 통해 남양에 은거하는 제갈량의 존재를 알게 됐고, 관우·장비와 함께 예물을 싣고, 남양의 양양 땅에 있는 그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방문한 끝에, 그를 군사(軍師)로 모실 수 있었다. 이때 제갈량은 27세, 유비는 47세였다.

‘삼국지연의’의 착한 주인공으로 설정됐으나 초반에 늘 패하기만 해서 독자들을 안타깝게 하던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 뒤 우연히 만난 수경선생 사마휘로부터 ‘당신은 훌륭한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책사가 없다’는 고강도의 무료 외부 컨설팅을 받는다.

‘복룡(伏龍)과 봉추 중에서 한 명만 얻어도 천하를 손에 넣게 될 것’이란 떡밥을 던지며 제갈량의 존재를 처음 언급했지만 사마휘는 그가 누군지 끝내 말하지 않아 유비와 독자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하지만 책사로 영입했다가 조조의 계략으로 북행하게 된 서서로부터 ‘복룡이 와룡이고 와룡이 공명이며 공명이 제갈량’이란 질 높은 정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유비는 관우·장비와 함께 세 번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간다. 정사(正史)에 짤막하게만 기록된 이 대목에 연의의 작가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풍성한 장면을 만들었다. 제갈량은 어찌 된 일인지 유비가 찾아갈 때마다 집을 비웠고, 관우와 장비는 계속 투덜거리지만 유비는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한다. 마침내 제갈량이 세 번째 찾아온 유비와 만나 ‘천하삼분지계’를 말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삼국지는 그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스토리의 경지에 올라선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진짜인가?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전에 기록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다.

<선주(유비)가 말했다. “그대(서서)가 그(제갈량)와 함께 이곳으로 와 주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날 수는 있지만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마땅히 왕림해 그를 찾아보셔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찾아갔다. 모두 세 번 찾아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凡三往乃見).>

제갈량이 직접 남긴 기록이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다. 이 글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언급했다. ‘삼고초려’라는 말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여기서 유래됐다.

<선제(유비)께서는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초가집에 살고 있던 신을 세 번이나 찾아주셨습니다(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

조선일보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 '삼국지' 중 제갈량이 '출사표'를 쓰는 장면.


그런데 삼국지 마니아라면 분명히 이름을 들어봤을 문헌이 있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에 후대 사람이 또 쓴 방대한 분량의 주석이다. 바로 ‘배송지(裴松之) 주(注)’(이하 ‘배주’)다.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유송) 사람인 배송지가 쓴 이 주석의 분량은 원문 36만 자(字)에 버금가는 32만 자 분량이다. 이 배주를 읽어야 삼국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주가 마침내 한국어로 완역돼 나왔다. 8권 4900쪽 분량의 ‘정사 삼국지’(글항아리)다. 번역자인 김영문 박사는 “이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삼국지’의 반대 개념인 ‘최대한의 삼국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배주가 인용한 당시 서적은 무려 230종이다. 이 중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사라는 뼈대에 피와 살을 붙인 것이 배주다. 배주는 역사의 다양성과 생동성이 드러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조조가 중풍에 걸린 척 쓰러져 숙부를 속였다는가, 낮잠을 제때 깨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첩을 죽인 일 등은 배주에만 나온다. 사마씨의 나라인 진(晉)나라 사람 진수는 조조의 증손자인 위 황제 조모가 죽은 일을 아주 간략하게만 기록했다. 하지만 배주는 조모가 사마소에 맞서 거병하려다 사마소의 부하인 가충과 성제에게 시해당했음을 밝혔다. 한국 고대사 관련 중요 기록이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인데, 옥저에 민며느리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배주에만 나온다.

그런데 제갈량전의 배주 중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기존 삼국지 독자라면, 그리고 삼국지를 알고 있는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참으로 기절초풍할 내용이다.

<유비가 번성에 주둔했다. 이때 조공(조조)이 막 하북을 평정하자, 제갈량은 형주가 그다음에 적의 공격을 받을 줄 알았지만, 유표는 성격이 느리고 군무에 밝지 못했다. 이에 제갈량은 북쪽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다. 유비는 제갈량과 옛날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었고, 또 제갈량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보통 유생을 대하는 사람으로 그를 대우했다. 좌중의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 제갈량만 혼자 남았는데도 유비는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유비는 원래 삭모(깃발·창·투구 등의 머리에 술이나 이삭 모양으로 엮어서 다는 장식) 엮기를 좋아했는데, 때마침 어떤 사람이 모우(털이 긴 소)의 꼬리를 유비에게 줬고, 이 때문에 유비는 직접 자기 손으로 삭모를 엮고 있었다. 이에 제갈량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현명하신 장군께서는 원대한 뜻을 품어야 하는데 겨우 삭모 엮기나 하고 있습니까?” 유비는 (그제서야) 제갈량이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채고 바로 삭모를 던지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잠시 시름을 잊으려 했을 뿐이오.”

제갈량이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진남장군 유표와 조공(曹公·조조)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진남장군이 조공에 미치지 못하오.” 제갈량이 또 말했다. “장군 자신을 조공과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역시 조공보다 못하오.” 제갈량이 말했다. “지금 모두가 조공에 미치지 못하고, 장군의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태로 적을 맞으면서 실책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나도 근심하고 있소. 어찌하면 좋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지금 형주는 인구가 적지 않지만 호적에 등록된 자는 드뭅니다. 그러니 평소대로 백성을 병력에 동원하면 민심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남장군에게 말을 하여 강역 안의 모든 유민으로 하여금 스스로 호적에 등록하게 하고, 등록된 호적 기록에 따라 군사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유비가 그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에 군대가 마침내 강성해졌다. 유비는 이 때문에 제갈량에게 뛰어난 책략이 있음을 알고 상객으로 예우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먼저 찾아간 게 아니라, 제갈량이 유비를 먼저 찾아갔던 것이라고? 여러 빈객 중 한 명이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했고, 단 둘만 남았는데도 본체만체했다고? 게다가 제갈량의 계책이라는 것이 천하 대세도 아니고 가슴을 뛰게 하는 호풍환우 스타일 전략 전술도 아니라 ‘인구 센서스 강화’ 정도의 노잼 행정업무였다니!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 기록에 대해 배송지 자신이 논평한 것이 있다. ‘출사표’의 관련 언급을 근거로 “제갈량이 먼저 유비에게 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어 “비록 듣고 본 사실에도 말이 다를 수 있어서 각각 상이한 기록을 남길 수 있지만 괴리된 내용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이상하다”고 적었다.

역자인 김영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해당 배주의 기록은 ‘위략(魏略)’에서 인용한 것이다. ‘위략’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역사서지만 위나라 학자 어환이 지은 책이므로 제갈량과 거의 동시대인의 기록이라고 봐야 한다. 비록 위나라 입장에서 촉한 군신의 미담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이런 내용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는 어렵다.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논란이 있는 일화여서 식자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삼고초려가 있었다는 쪽이 더 역사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일보

지난 1월 7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진 '정사 삼국지' 완역자 김영문 박사. '배송지 주'까지 한국어로 완역한 최초의 책이다. /김동환 기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위략’의 해당 기사는 유비가 제갈량 앞에서 삭모를 엮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해 디테일이 살아 있는 기록 같지만, 자세히 보면 유비를 폄훼하고 조조보다 훨씬 못한 인물로 보이도록 교묘하게 쓴 기사다. 위략은 유비의 아들 유선이 어렸을 때 노예로 팔려 갔다가 나중에 유비와 상봉했다는 일명 ‘유선 벤허설(說)’ 기사도 실었는데, 그걸 주석에 소개한 배송지가 유선의 유소년기를 연대상으로 일일이 고증하면서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위략은 조조 위주로 대단히 편파적인 관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었을 뿐이다. 유비와 제갈량이 대화를 하면서 조조를 ‘조공’이라 칭했을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위략의 기사 중 뿔뿔이 흩어진 뒤 다른 책에 소개된 기록 중 하나가 고조선 관련 기록이라는 것이 대단히 답답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제갈량이 ‘출사표’를 썼을 당시는 형주에서부터 유비와 함께했던 촉한의 신하들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을 때였다. 그중에는 조운(조자룡)도 있었다. 사람이란 뻥을 치더라도 상황에 맞게 쳐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당시 상황을 뻔히 아는 사람이 한두 명 아니게 존재했을 시점에 유비가 자신을 삼고초려했다는 허위 언급을 공문서상에서 했다? 후주 유선이 아무리 어리석은 인물이라 해도 황제인데, 황제에게 올리는 표에? 더구나 후주는 성장 과정에서 그 때의 일을 선주 유비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제갈량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제갈량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고초려는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도중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혹시… 위략에 나온 기록이 맞는 건 아닐까? 제갈량이 취직을 위해 유비를 먼저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유비가 그를 처음엔 어리다고 무시하고 본체만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제갈량은 참으로 큰 뜻을 품고 등용돼 출세하려 했던 ‘대(大)취준생’이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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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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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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