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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위기의 청년들에게…‘야신’의 한마디 “억울하냐, 일어서라”[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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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野神)’ 김성근 감독
경향신문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이 1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평생 ‘이기는 야구’를 강조하며 ‘지옥 훈련’을 해온 그는 “사람들은 나보고 독하다고 하지만, 나는 선수들의 미래를 보고 가는 것”이라며 “10년, 20년 뒤 선수들이 ‘그때 그 감독 덕분에 내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지도자의 성공”이라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84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그라운드에 꼿꼿이 서서 펑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넘어지는 이가 있다면 지체 없이 일어서라 호통치는 그는, 숨 쉬는 매 순간이 야구인 ‘영원한 현역’이다. 아내에게조차 숨긴 채 세 차례의 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야구뿐이었다. 야구장에만 설 수 있다면 수술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고름이 터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투혼의 삶이다.
‘야신(野神·야구의 신)’ 김성근. 그는 지난해 4월, JTBC <최강야구>를 떠나 유튜브 기반의 <불꽃야구> ‘불꽃파이터즈’ 지휘봉을 새로 잡았다. 제작사인 스튜디오C1이 JTBC와의 갈등 끝에 독자적인 길을 택하자 이대호, 박용택, 정근우 등 핵심 선수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단 2회 만에 동시 접속자 23만명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현재 저작권 등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스튜디오C1은 시즌 2 제작을 예고하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재일교포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언제나 경계에 선 ‘이방인’이자 ‘비주류’였다. 프로야구 통산 1388승이라는 역대 최다 승리 2위의 대기록을 세웠으나, 그 영광 뒤에는 ‘역대 최다 해임’이라는 시린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삶은 오로지 스스로 홀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서슬 퍼런 소신 때문일까.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주름진 얼굴엔 늘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린다.
여전히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 문장은 서툴고 거칠다. 그러나 그 투박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삶을 관통하는 묵직한 철학적 울림이 있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마주한 노감독은 “김성근의 인생에 포기란 없다”는 식지 않는 열정과 삶의 지혜를 나직이 들려주었다.


- <최강야구>를 떠나 <불꽃야구>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어요. 당초 <최강야구> 제작을 맡았던 장시원 PD와의 의리 때문인가요.

“장 PD와는 3년 가까이 호흡을 맞췄으니 그 의리도 무시할 순 없죠.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나는 JTBC 소속이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 선수들이 다 거기(불꽃야구)에 있잖아요. 리더는 혼자 행동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이름이 무엇이든 내게 중요한 건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인가와 내 제자들이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가예요.”

- 얼마 전 법원이 JTBC가 제기한 가처분 결정을 인용했어요. 그로 인해 <불꽃야구> 본방 영상이 대부분 삭제 조치되면서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의 기록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그에 대해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처지는 아니에요. 분명한 사실은 영상이 지워진다고 해서 우리가 그라운드에서 시합하고 땀 흘린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영상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대로 시합을 했고, 그 순간을 살았어요.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면 그게 기적이고 미래입니다.”

- <최강야구> 시절, 현역에서 은퇴한 ‘최강몬스터즈’ 선수들에게 “여러분은 프로 출신이고, 현재도 프로다. 돈 받고 하고 있다. 돈 받고 한다는 것은 프로라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어요. ‘프로 정신’은 무엇인가요.

“프로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사명감을 짊어져야 해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프로라 불릴 자격이 없죠. 그리고 늘 미래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야 해요.”

- 미래 의식이라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하나의 미래고 기적이에요. 안 만났다면 우리 사이에 미래는 없으니까. 야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해 몸을 움직이는 건 팬들에게 ‘야구는 이런 것이구나’를 보여주면서 희망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예요. 그런 순간순간이 쌓여 우리와 팬 사이에 관계와 기대가 형성되는 것, 그게 미래예요.”

84세의 나이에도 꼿꼿이 펑고를 날리는 ‘영원한 현역’으로 투혼의 삶
프로는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 책임·사명감으로 미래 의식하며 살아야
법적 다툼 ‘불꽃야구’ 영상 삭제엔 “최선을 다한 땀은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은 어려운 길 속에 늘 새로운 길 있는 것 …내 사전에 비관·포기 없어
‘할 수 있다’ 아닌 ‘반드시 해야 한다’…생존 위한 사투 ‘일구이무’ 정신 강조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묵직한 격려 “길은 너에게만 있다”


김 감독은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일본 교토의 허름한 판잣집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살림살이였다. 그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아버지는 불의의 열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부모님은 어쩌다 일본으로 이주하신 건가요.

“경남 진주 산골에서 살다가 너무 배가 고파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고 해요. 교토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공업(공장일)도 하셨죠. 하지만 정말 가난했어요. 그날그날 밥 먹고 학교 가는 게 기적이라, 장래 계획 같은 건 품을 수조차 없었어요. 유일한 도시락 반찬이 밥 위에 뿌린 간장이었을 정도니까요. 온 가족이 새벽부터 일하러 나갔고, 중학생 때부터는 나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으니까요.”

- 우유 배달을 하고 막노동도 했다죠.

“그랬어요. 생선가게에서도 일했고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어요.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갔어요.”

- 어린 나이부터 삶이 고달팠네요.

“그래도 가난을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왜 가진 게 없지?’란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오히려 가난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어요. 세상에 기댈 곳이 없으니까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정신이 견고해진 거예요. 나는 매 순간 세상과 맞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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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왼쪽)이 1964년 11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기 직전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전이어서 이대로 아들과 영영 생이별할 것을 걱정한 어머니는 김 감독의 영주귀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끝내 김 감독의 뜻을 꺾지 못하자 사진기를 가져오라 해 사진촬영을 했다고 김 감독은 회상했다. / 티빙 오리지널 ‘김성근의 겨울방학’ 캡처


- 야구도 중학 시절 처음 한 건가요.

“초등학생 때부터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시 한국에선 아이들이 주로 축구를 하고 놀았다면, 일본에선 공터에서 야구를 하며 놀았으니까. 난 야구하는 게 몹시 즐거웠어요.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실력은 평범했죠. 그래서 야구 명문고 진학은 꿈도 못 꿨습니다. 대신 학비가 싸고 야구부가 있는 교토부립 가쓰라(桂川)고등학교에 입학했죠. 남들은 기차 타고 다니는 거리를 나는 매일 왕복 2시간씩 걸어서 다녔어요.”

- 포지션이 투수였죠?

“고3 때 갑자기 투수를 하라고 해서 맡았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야구부는 굉장히 열악했어요. 장비는커녕 야구는 9명이 해야 하는데 선수가 7~8명밖에 없었을 정도니까요. 야구 감독이 일반 교사라서 연습 때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뭘 배우지도 못했죠. 선수가 없다보니 시합을 할 때는 매번 다른 운동부나 학급에서 학생을 빌려 써야 했어요. 저 역시 육상, 수영, 축구 같은 다른 운동부 호출을 받고 뛰기도 했고요.”

- 배움 없이 어떻게 투수를 하나요.

“잡지나 신문에 실린 사진 속 투구 폼을 보고 따라 했어요. 야구공이나 글로브를 살 돈도 없어 가쓰라 강물에 하루 돌멩이 200개씩 던지며 연습했죠. 당시엔 주력도 나빠 100m를 고작 17초에 뛰었어요. 육상부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내리막길을 뛰는 훈련이 도움이 될 거라더군요.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1시간 이상 내리막길을 달렸어요. 우유 배달도 하체 훈련 과정으로 활용했고요.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비관이란 걸 모르고 살았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히 산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하나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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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당시 실업야구 교통부의 투수였던 김성근(왼쪽)은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백인천(가운데)도 국가대표로 함께 뛰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3이던 1959년 인생을 바꾼 운명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8월 제4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돼 생애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언어 불통 문제로 1년도 못 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교토의 실업 야구팀인 상호차량(相互車輛)에서 뛰었다. 1961년 한국의 실업 야구단인 교통부에 입단했고, 이듬해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시기는 1964년 12월이다.

- 재일교포로서 한·일 양국에서 이방인 느낌을 받았을 법한데, 어떻게 헤쳐갔습니까.

“학창 시절엔 누구도 자신이 재일교포임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뽑히고 나서야 서로 ‘너도 교포였구나’ 했죠. 일본 실업팀에 가려고 할 때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번번이 탈락하는 차별을 겪었지만 난 그걸 어마어마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다시 한국으로 왔고, 대한민국 국가대표(1961년)가 돼 좌완 투수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준우승을 거두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으니까요. 그러니 인생은 어려운 길 속에 늘 새로운 길이 있는 거예요. 김성근에게 포기란 없어요.”

-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영등포로 이동하는데 창문 너머로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어요. 그런데 지나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충격이었죠. 동아대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선 내가 가방을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이 두 가지 일을 겪으며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누구도 믿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A가 안 되면 B가 있어야 하고, B가 없으면 C를 찾아야 한다’는 생존의 흐름을 터득한 거죠. 실제로 그날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았어요.”

-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선수로 한국을 처음 방문하던 해인 1959년, 가족이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해 곧 북송선을 탈 예정이었다죠.

“결혼한 큰형이 지원해 큰형 가족이 먼저 북한으로 갈 계획이었어요. 북한에 가면 모두가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된다고 선전했으니까요. 나도 갈 뻔했죠. 1959년 9월 도쿄의 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교에서 입학시켜주겠다며 입학원서를 보내왔거든요. 하지만 야구부가 없어 안 간 그 학교에 입학했다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 거예요. 바로 그 전달에 한국 땅을 밟고 한국을 봤으니 러키(행운)한 거죠. 그래서 대회를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적극 만류했어요. 대한민국은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했죠.”

-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런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너무 가난해 살아 있는 사람의 눈도 빼간다고 알고 계셨어요. 또 나와 같이 야구하던 한 친구는 한국은 비행기에서 기름을 몰래 빼가는 나라라고도 말했고요.”

-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한국의 경제 상황은 몹시 안 좋았어요.

“물론 길에 총을 찬 군인들이 보이고, 부랑인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난 대우를 잘 받았어요. 특히 1962년 기업은행 소속이 되면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실컷 먹을 만큼 돈을 많이 받고, 옷도 잘 입었어요. 무엇보다 야구하는 즐거움이 있었고요. 그래서 이곳이 베스트구나, 생각했죠.”(당시 그는 한국 최고의 왼손 에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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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2월 14일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고 있다. 형이 북송선 승선 지원서를 내 김성근 감독의 가족도 탈 뻔했지만 직전에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일원으로 한국을 경험한 김 감독의 만류로 무산됐다. / 마이니치


-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기 전이어서 어머니가 영주귀국을 완강히 반대했다죠. 가족과 영영 못 볼 수도 있던 시기였는데 어떤 각오로 내린 결정인가요.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엉엉 울었어요. 그러고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 가지를 결심했어요. 첫째, 내 결정은 내가 책임진다. 둘째,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셋째, 대한민국 최고가 되겠다.”

- 하지만 혹사로 인한 심각한 어깨 부상으로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 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해야 했어요. 이후 야수로 전향했지만 1968년 결국 선수생활까지 그만둬야 했고요. 눈앞이 캄캄했을 것 같아요.

“사람은 그럴 때 강해지는 거예요. 언젠가부터는 밥을 먹으려 해도 팔을 못 들겠더라고요. 하지만 슬럼프에 빠질 여유가 없었어요.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까 길을 찾는 게 급선무였죠. 지금 한국 야구에 없는 게 뭔지 살폈어요. 트레이닝 파트(체력 강화)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선수들 몸 만드는 것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다음엔 투수가 모자란 게 보여서 투수코치를 했고, 그러다 감독까지 하게 된 거예요. 어떡하면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살 수 있는지 치열하게 찾다보니 길이 하나씩 열린 거예요. 그래서 내겐 이 모든 게 커리어가 아닌 생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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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간 지도자 생활을 한 김성근 감독에겐 ‘꼴찌 재건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만년 꼴찌였던 약체팀을 가을야구까지 올리며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진은 1996년 플레이오프를 치른 쌍방울 선수들의 모습이다. / 연합뉴스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57년간 고교·실업팀에 이어 7개 프로구단 감독을 맡았다. 그런 그에겐 ‘꼴찌 재건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이유는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만년 꼴찌였던 약체팀을 가을야구까지 올리며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신생팀에 가까웠던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아 1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고 재임 4시즌 반 동안 4번의 한국시리즈 진출과 3번의 우승을 거뒀다. ‘SK 와이번스 왕조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지옥 훈련과 철저한 준비,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최선을 다할 뿐 다음은 없다)’ 정신으로 요약된다.

- 태평양 돌핀스나 쌍방울 레이더스 등 최하위팀을 지도하며 선수들에게 강조해 주문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어느 팀에 가든 말했어요.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가난한 위치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로 생각을 바꾸라고. 그래야 길이 열리는 법이니까요.”

- SK 시절 ‘벌떼 야구’와 ‘철저한 데이터 야구’로 왕조를 구축했어요. 하지만 상대 팀에서는 “야구를 재미없게 만든다” “승부욕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건 패자의 변명일 뿐이에요. 승부의 세계에서 상대를 어떻게 꺾을지 고민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억울하면 끙끙 앓으면서 나를 이길 대책을 세워야지, 비난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나는 상대가 뭐라 하든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요. 내가 하는 야구에 대해 그들이 뭘 안다고 평가를 합니까? 진실이 없는 평가에는 대꾸할 가치가 없어요. 야구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로서의 예의예요. 이긴 사람을 부러워할 시간에 자기 팀의 허점부터 찾는 게 순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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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19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열린 2010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삼성 라이온즈-SK 와이번스 경기에서 SK 와이번스가 우승했다. 경기 직후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과 선수들이 팀 대형 깃발을 들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 연합뉴스


- 김성근 감독 하면 ‘지옥 훈련’으로도 유명해요. 훌륭한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리더라면 확실한 사명감이 있어야 해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지는 감독은 필요 없어요.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없으면 그건 도망가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보고 독하다고 하지만, 나는 선수들의 미래를 보고 가는 거예요. 10년, 20년 뒤에 그 선수들이 ‘그때 그 감독 덕분에 내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지도자의 성공이에요. 리더는 욕먹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선수와 팀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죠.”

- 프로구단에서 방출되거나 지명을 받지 못한, 이른바 ‘벼랑 끝’ 선수들을 모아 고양 원더스를 이끌었어요. 엘리트 야구의 최정점에 있던 감독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선수들을 지도한 건데, 어떻게 회상하나요.

“사람이 집중하면 반드시 길이 있는 거예요. 고양 원더스 선수들은 1년 365일 중 단 이틀만 쉬었고, 하루에 공을 1000개씩 쳤다고. 그러려면 3시간씩 계속 쳐야 했는데, 손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방망이를 휘둘렀어요. 그게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선수도 단 한 명도 없었고요. 걔네들은 그 속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노력해서 20명 가까이 프로로 갔어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아이들이 스스로 길에 들어가서 미래를 만들어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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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은 ‘지옥 훈련’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지치지 않고 직접 선수들에게 펑고를 쳐준다. 오른쪽 사진은 한화 이글스 시절 정근우 선수가 김성근 감독의 펑고를 받다가 쓰러져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이 80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그는 선수들에게 직접 펑고를 쳐준다. 엄한 그의 손을 거쳐 무명 선수가 50억, 100억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 선수로 거듭난 사례는 많다. 2002년 LG 트윈스를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고도 해임당한 그를 위해 그해 제자들이 리츠칼튼호텔에서 연 회갑연도 두고두고 회자됐다. 옛 OB, 태평양, 쌍방울, 삼성과 LG의 전현직 선수와 코치들이 모두 모였다.

- 세 번의 암 수술을 받으면서 팀은 물론 부인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죠.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닙니까.

“내가 아프다고 끙끙대면 주변 사람들이 고민하고 힘들어하잖아요. 왜 그 짐을 남에게 나눠줍니까? 그리고 야구단이라는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팀 전체가 흔들려요. 사람들은 나보고 비정하다고 하고, 부부 사이가 나쁜 거 아니냐고 수군대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뭘 알겠어요? 리더는 자기 스스로를 통제해야 해요. 아픈 건 내 문제고,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일 뿐이에요. 타인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패자가 되는 거예요.”

- 그러면 너무 외롭지 않나요.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친구가 왜 필요해요? 서로의 목적이 맞을 때 곁에 있을 뿐 결국 다 배신하는걸. 나는 대한민국에서 야구하며 살아오면서 참 많은 배신을 당했어요. 그러니 사람을 믿는 사람이 바보예요. 나는 사람을 믿기보다 처한 상황과 헤쳐가야 할 방법을 믿어요.”

- ‘야신’이란 별명을 붙여준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랑 나이가 똑같아요. 하지만 선수 시절부터 그 친구는 한일은행, 나는 기업은행 식으로 서로 팀이 달라서 접촉할 시간이 없으니 개인적 친분은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는 워낙 잘하는 친구로 항상 높은 데 있었고 나는 밑이었죠.”

- 야구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걸요. 라이벌 의식이 있었을 법도 한데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우리나라 야구를 이끌어온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한국 야구계의 거목이지.”

인터뷰 말미, 김 감독에게 물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9회말 2아웃’ 위기에 처한 청년들, 혹은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느냐고. 그는 말했다. “억울하면 일어서라!” 따뜻한 위로 대신 ‘길은 너에게만 있다’는 매서운 일갈을 택한 노장. 세상의 모진 풍파를 오직 홀로 받아내며 증명해온 그의 삶이 응축된,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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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선임기자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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