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레저타운으로 조성된 경주보문관광단지 개장을 알리는 1979년 4월11일 경향신문 ‘나래편 관광한국 고금을 함께 호흡’ 기사.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
얼마 전 경주를 다녀왔다. 요새 인기 많다는 ‘황리단길’ 구경도 할 겸, 104년 만에 6점의 신라 금관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전시도 구경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경주를 찾았다.
신라 금관은 이전에도 띄엄띄엄하게나마 다 본 적이 있고 내 전공 분야도 아니라서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104년’ 만이라니, 이것은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거기다 젊은이들의 ‘핫플’로 유명하다는 황리단길도 가보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경주 도심을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황리단길이라는 말이 생기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전반적인 감상은 ‘격세지감’, 이 네 글자로 압축됐다. 세련된 카페와 식당, 번듯한 한옥 숙소 사이로 젊은 여행객이 가득한 황리단길. 이곳이 과연 내가 알던 그 동네인가 싶어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기억 속 한적했던 경주 박물관의 풍경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간대별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금관 전시실은 관람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주가 참 많이도 변했구나’ 하는 감상을 안고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와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다가 황리단길이 너무 많이 바뀌어 놀랐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운전사는 “제가 거기 살았어요”라며, 당신 아버지가 이곳에 정착하며 살아온 내력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꽤 흥미로운 이촌 향도의 개인사이자 경주의 도시 개발사를.
1971년 작성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1면의 대통령 지시사항.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다. |
운전사가 들려준 부친의 생애사
“우리 집은 원래 지금 경주역 동쪽 저기, 산 몇개 넘어가면 있는 산골에 살았어요.”
한 끼 간신히 해결하고 나면 다음 끼니가 걱정되던 산골의 지독한 가난, 운전사의 부친은 경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마침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일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완공된 후에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또 일을 하셨죠.”
발굴 이야기에 내가 반색하며 “그럼,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발굴도 참여하셨나요?”라고 물었다. 마침 천마총과 황남대총 금관을 보고 온 터, 대충 연도상 1973년 천마총 발굴에 참여하신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니요. 그때는 발굴 안 하고 보문단지 공사하러 가셨어요.”
“황리단길에 있던 우리 집에서 보문단지 공사 현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는데, 늘 남보다 일찍 가시고 아주 성실하셨죠. 그래서 거기 소장이 아버지를 아주 좋게 보고, 비 와서 공치는 날도 그냥 앉았다 가라고 하며 하루 일당을 쳐주셨대요.”
황리단길에서 보문단지까지는 직선거리로도 6㎞가 넘는다. 길을 따라간다면 10㎞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시다니, 참으로 근면하고 강건한 분이시다. “정말 성실하셨나 봐요”라고 한마디 거들자, 운전사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발굴할 때나 보문단지 공사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왔었대요. 발굴할 때 대통령이 오면 인부들한테도 각각 금일봉을 줬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걸로 막걸리만 사 먹지 말고 돼지고기라도 사서 식구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했대요.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에 아주 관심이 많았지.”
옛 대통령에 대한 아련한 애정이 묻어나는 회고였다.
“그렇게 출퇴근하실 때, 지금은 폐역이 된 옛날 경주역 있잖아요? 그 앞에 성동시장이라고 있거든. 거기에서 장을 봐서 오시곤 했어요.”
내가 물었다. “옛 경주역은 폐지되고 지금 역은 외곽에 똑 떨어져 있으니, 성동시장도 좀 쇠퇴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 경주역은 주변이 허허벌판이잖아요? 그땐 경주에서 포항이나 대구로 기차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오며 가며 시장에 들러 뭐라도 하나씩 사 가니, 시장이 아주 번창했지. 우리 집은 늘 아버지가 장을 봐 오시니까, 동네에서는 홀아빈 줄 알았대요. 여자가 장을 안 보고 남자가 장을 보니까. 허허.”
지금의 경주를 만든 사람들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데, 1970년대를 살아간 한 사람의 생애사와 경주라는 도시의 개발사가 머릿속에서 교차하며 그려졌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해 1970년에 완공되었으니, 운전사의 부친은 그사이 언젠가 산골에서 나와 경주로 이주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던 시절, 봄철이면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이 무작정 도회지로 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경주에 일감이 있다는 소식에 부친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고속도로 건설 당시 대구~부산을 잇는 노선을 두고 경주·언양안과 밀양·마산안, 창녕·마산안이 경합했다는 점이다. 이때 만약 밀양이나 창녕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결정되었더라도, 부친의 첫 행선지가 경주였을까? 알 수 없을 일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인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된다. “신라 고도(古都)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친필 메모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계획안이었다. 이해 대선을 힘겹게 넘긴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 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문화 한국의 중흥이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한 방책이 될 것이었다. 1972년 무열왕릉지구 정화사업을 시작으로 경주 도심의 주요 유적지들이 정비에 들어갔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황리단길의 한식 건물과 공원 같은 사적들은 이 시기 주변의 민가들을 철거해 사적지를 성역화하며 만들어낸 경관이다(유지민, <‘천년 고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신라 금관 전시 보러 다녀온 경주, 달라진 풍경과 인파에 놀라
토박이 택시 운전사, 각종 현장서 일한 아버지 이야기 들려줘
‘다정한 모습’ 박정희 기억도…거시사의 다면적인 이해 필요
운전사의 부친은 1973년 천마총 발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니, 그 이전 사적지구 정화사업에 잠깐 몸을 담았다가 보문단지 건설지구로 일터를 옮긴 듯하다. 경주의 사적 정비를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때 사적지구 정비계획의 비중은 전체 사업비의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보문관광단지는 IBRD의 차관까지 유치한 거대한 사업이었으니, 일감의 양이나 지속 기간으로 볼 때 이쪽이 훨씬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1970년대 경주에서 벌어진 사적 정비와 발굴, 보문관광단지 건설과 같은 일련의 사업들은 현재 경주의 도시 경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마련된 공원화된 유적지, 전통 양식 건물들로 만들어진 ‘천년 고도’의 이미지, 그리고 세계적 행사 개최가 가능한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은 현재의 경주 활용 방식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때 마련된 도시 경주의 발전 궤도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이 시기 경주 개발은 학술적으로 다각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국민/민족 만들기’의 차원 같은 정치사·문화사적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하고, 세계사적 차원에서는 20세기 중후반의 관광 개발 원조의 한 사례로 주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시기 경주 개발에 참여한 이들은 <그래도 우리는 신명바쳐 일했다: 서라벌을 변화시켰던 사람들의 이야기>(경주개발동우회 편, 1998)라는 책을 남겼다. 여기에는 당시 책임자나 담당자 같은 관리자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렇지만 실제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땅을 고르고 시멘트 포대를 나르던 이들, 성역화되는 유적지 때문에 옛집에서 쫓겨난 사람들 등은 그저 숫자로만 남고 이야기로는 남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수록될 것인가?
단지 거시사의 보충을 위해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 자신이 역사책의 어떤 페이지에서 살아갔는지 이야기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말단 일꾼에게까지 금일봉을 챙겨주며 다정한 충고를 건네던 그 대통령, 내 고장을 특별히 아껴주던 그 대통령이, 다른 현장에서 어떠한 모습을 지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이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통찰력을 길러줄 것이다. 한편, 꼭 까칠하고 비판적 시선을 키우기 위함만도 아니다. 내 삶이, 내 노동이 거시사의 어느 퍼즐을 맞추는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자기 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치게 된다.
어느덧 경주역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며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이야말로 지금의 경주를 만든 주역이시네요.”
장지연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