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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고분… 존재는 그저 고개 숙일 뿐, 우리가 몰랐던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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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저편에 잠들어 있는 가야의 영광 동틀 무렵 드러나는 ‘다라국’의 흔적
경향신문

합천은 해인사 소리길의 설경부터 국내 유일의 운석충돌구, 다라국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자연·지질·역사가 겹겹이 만나는 보석 같은 겨울 여행지다. 사진은 동이 트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라국 고분군.


겨울에 갈 국내 여행지를 떠올려보면 늘 거기서 거기다. 이미 가봤거나 혹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겨울 여행의 선택지는 좁다.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자.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의외로 보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합천은 겨울이기에 갈 만한, 우리가 몰랐던 겨울 여행지다.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의 향연 ‘소리길’
겨울이어서 더 아름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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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로 향하는 홍류동 소리길.


합천 여행의 첫 번째 이유는 해인사다. 세계문화유산인 그 절을 보기 위해 합천으로 들어간다. 보통은 차를 이용해 가급적 경내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들어가려 하지만, 쫓기지 않는다면 아래편 주차장부터 걸어서 올라가보길 권한다. 꼭 걸어볼 만한 길이어서다. ‘소리길’이라는 이름도 있다. 계곡이 가진 생명력을 소리로 느끼는 길이라는 의미다. 이름처럼 물 흐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가 얹어진다. 잔잔하지만 경쾌하기 그지없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협연 같다.

소리길의 총길이는 7.3㎞, 4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가장 아래 각사교에서 가장 위의 영산교까지 걸어서 닿으면 비로소 해인사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반드시 걸어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가야산 19경 중 16경이 이 길 안에 있어서다. 그러니 소리길만 걸어도 가야산의 백미를 거의 다 맛보는 셈이 된다.

소리길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홍류동이다. 농산교를 지나 길상암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름을 보면 왜 그렇게 불렀는지 단박에 이해가 간다. 이곳이 아름다운 계절은 가을이구나,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합천은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다. 지리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분지 지형이어서 서쪽에서 몰려오는 눈구름이 좀처럼 지리산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설경을 만났다. 계곡은 물 흐르는 모습을 찾기 어려울 만큼 전체가 하얗게 얼어붙은 모습이다. “홍류동의 백미는 가을”이라던 이야기를 정정해 주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풍경이다. 골짜기는 수묵담채화가 되어 눈에 담겼다. 다리 위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면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물이 기기묘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다. 가만히 계곡을 감상하고 있자니 온갖 소리가 귀에 날아와 닿는다. 둔탁하게 ‘뚝’ 소리가 나더니, 몇 걸음 움직이면 얼음 아래로 ‘쪼로록’ 흐르는 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홍류동 계곡의 겨울 소리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소리길을 걷다 보면 껍질이 벗겨진 채 속이 드러난 소나무를 보게 된다. 칼로 그어서 만든 상처가 수십개씩 나 있다. 송진을 얻기 위해 인간이 낸 상처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송진 채취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소나무는 그때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 번 훼손된 자연은 회복이 어렵습니다.” 안내판의 문구가 시리다.

5만년 전 200m 크기의 운석이 떨어진 곳
국내 유일의 운석충돌구, 초계적중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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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합천읍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첩첩이 늘어선 산지를 만난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도 있다. 초계면과 적중면은 누가 보아도 도드라지는 분지 지형이다. 지금은 외부로 통하는 도로가 군데군데 놓였지만, 원래는 어느 방향으로도 트인 곳이 없이 꽉 막힌 곳이었다. 분지 안쪽으로는 이렇다 할 물길도 없다. 이 안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저수지에 가두어 쓰고 있을 정도다.

이를 유심히 살핀 고(故) 임판규 선생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합천 토박이였고, 의사였으며, 천문에 무척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임판규 선생은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보고 국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땅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여기에서 도출한 결과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할 만큼 열심이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초계면과 적중면 일대는 5만년 전 운석이 떨어져 만들어진 지형이라는 것. 더구나 이 정도 규모의 운석충돌구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희귀한 사례였다. 한반도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건 첫 번째 사례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집념이 밝혀낸 지질학적 쾌거인 셈이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연구센터는 분지 내에서 깊이 142m 아래까지 땅을 뚫었다. 그 지점에서 꺼낸 표본의 탄소연대를 측정해보니, 운석의 충돌로 강력한 충격파가 일어나 지하에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었고, 이 영향으로 암석과 광물 따위에 충격 변성이 일어난 흔적이 나왔다. 세계적으로 공식 인정을 받은 운석충돌구는 200여개에 달한다. 영어로는 크레이터라고 부르는데, 아시아에서도 드문 사례로 꼽힌다.

충돌구는 지름만 약 7㎞다. 충돌구의 크기와 깊이 등으로 추정한 운석의 크기는 200m 정도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안에 초계면과 적중면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충돌구 지형이 세찬 바람을 산이 막아준 덕분에 연중 일정한 기후를 누렸다. 땅이 평평해서 농사를 짓기에도 좋았다.

이곳의 지형을 한눈에 담을 최적의 장소는 대암산이다. 대암산은 운석이 땅에 충돌하면서 솟아오른 서쪽의 산이다. 정상은 해발고도 591m. 이곳에 서면 초계적중분지가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온다. 꼭대기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도 있다. 패러글라이딩 파일럿 사이에서는 최고의 활공 코스로 꼽히는 유명한 스폿이다. 역시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지형이라서 패러글라이딩도 안전하고 안정적이다.

최근에는 대암산 활공장에서 활공이 끝나는 시간쯤부터 백패커가 모여들기도 한다. 해가 질 무렵 텐트를 치면 하늘에서 별이 총총 뜨기 시작하고, 이내 땅 위에서도 별이 뜬다. 마을에서 밝히는 불빛이 하늘의 별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다만 이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임시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데, 오르는 길이 협소하고 굴곡이 심하다. 활공장을 수시로 오가는 차량도 많아서 주의해야 한다.

동이 트기 전 합천의 마지막 목적지를 찾아 쌍책면으로 향했다. 황강이 박물관 앞에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박물관 옆 언덕을 올라 뒤로 돌아가니 불쑥불쑥 솟아오른 고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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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 채취로 상처 입은 소나무.


경상북도 일대는 고분이 많다. 신라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가야의 흔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지역이 고령이다. 합천과 가까운 고령은 대가야의 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야는 여러 소국의 연합체였다. 그렇다면 합천의 고분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 어느 곳의 흔적일까.

그 답은 합천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다. 합천은 ‘다라국’에 속했었다. ‘다라국’은 변한을 모태로 한 가야의 세력 중 하나였다. 알려진 게 많지 않지만, 박물관 옆에서 수십 기의 고분이 발견되고, 적잖은 유물이 출토됐다.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에 기록으로만 전하던 ‘다라국’의 존재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현재 출토가 이루어진 고분은 극히 일부다. 이 일대에는 약 1000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옥전고분군이라고 부른다.

멀리서부터 동이 트고 밝고 따스한 햇살이 떠오르자 그 빛이 사위를 밝혔다. 밤새 얼어붙었던 땅에서 한기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고대의 고분군에서만 볼 수 있는 겨울의 풍경이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신비로움. 오랫동안 시간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고대국가가 깨어나는 듯한 순간이었다.

합천의 맛

사하촌의 송이버섯 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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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사하촌은 이제 식당가가 되었다. 숱하게 많은 가게 중 삼일식당은 가을에 채취한 온갖 나물과 버섯요리가 일품이다. 특히 가야산에서 채취한 ‘송이버섯 정식’은 송이버섯으로 말갛게 끓인 국의 향기가 그윽하다. 무려 서른 가지 찬이 상을 가득 채우는데 맛까지 좋아서 송구한 기분이 든다.

예쁘기도 한 오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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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합천댐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합천호관광농원이 있다. 농가체험 농원이라서 숙소도 있고 다양한 즐길거리도 있다. 하지만 이곳을 대표하는 건 오곡밥이다. 보리, 수수, 조, 찹쌀, 흑미가 오색으로 예쁘게 담겨 나오는데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다. 나물은 모두 현지 농가에서 수매한 것만 취급한다. 곁들여 나오는 된장찌개니 제육볶음, 김치까지 모두 정성이 가득하다.

향이 은은한 송기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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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떡방앗간은 초계면에 자리한 오래된 방앗간인데, 소나무의 껍질로 만든 송기떡으로 이름이 났다. 송기떡은 춘궁기에 구황식품으로 먹던 것.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등장한다. 소나무의 속껍질을 불리고 곱게 갈아 찹쌀, 콩가루를 함께 써서 만든다. 검붉은 빛깔의 떡 단면을 보면 소나무의 껍질에서 보았던 색채를 닮았다.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좋은데 특히 뒤늦게 입안으로 퍼지는 은은한 소나무 향이 일품이다.

글·사진 정태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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