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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고 메우고 반복, 바보 같지만 그것이 인생”... 단색화 거장 정상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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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상화 화백이 지난 2023년 작품 ‘무제 84-3-8’(1984) 앞에 앉은 모습. 멀리서 보면 흰색 벽지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핏줄 같은 격자무늬 사이에서 다층적인 빛깔이 우러나온다. 한 일본 평론가가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라고 평한 이유다. /갤러리현대


“하나 뜯어내고 메우고, 또 뜯어내고 메우고…. 참 바보스럽죠. 하지만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움이 바로 제 작품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이지요."

수행에 가까운 노동을 통해 시간의 무늬를 새긴 작가. 단색화 거장 정상화(94) 화백이 28일 오전 별세했다. 아흔 넘어서도 조수 없이 작업했던 그는 3년 전 본지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도 그림이라는 게 끝이 없더라”며 “타고난 재주, 그거 안 통한다. 그림은 노력한 만큼 나타난다”고 했다.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한국 전위미술 1세대로 활약했다. 1950~60년대 앵포르멜(비정형 회화) 경향의 작업을 선보였고, 1969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 고베와 프랑스 파리에 장기 체류하며 ‘격자형 추상회화’라는 독자적 스타일을 창안했다. 1992년 영구 귀국 후엔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만 몰두해왔다.

1980년 공항 세관원이 둘둘 말아온 그의 작품을 펼치더니 “여기 어디에 그림이 있느냐”고 묻는 해프닝도 있었다. 얼핏 보면 흰색뿐인 그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해서다. ‘벽지 같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핏줄 같은 격자 무늬 사이에서 수십 가지 색이 중첩돼 우러나온다. 인내와 투지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캔버스에 고령토를 바르고, 완전히 마르면 접어서 화면에 균열을 낸 뒤 일부 고령토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물감을 채워 넣고 또 뜯어내고 물감을 메운다. 그 무수한 반복적 행위를 두고 화가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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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경기도 여주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정상화 화백.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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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정상화 개인전에서 동료 화가들과 함께 있는 모습. 왼쪽부터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갤러리현대


198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작가와 인연을 이어온 갤러리현대는 “그가 구축한 화면은 신체적, 정신적 노동의 시간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며 “2차원의 평면을 깊이 있는 무한 공간으로 확장시켰다”고 했다. 2011년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2021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작품은 리움미술관, 미국 스미스소니언 허쉬혼 미술관, 홍콩 엠플러스 미술관,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에 소장돼 있다. 유족은 아내 박영자씨와 아들 정경철, 딸 정인선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 병원, 발인은 30일 오후 1시.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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