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평생 지켜온 ‘민중해방’ 신념, 지금도 ‘우리의 길’ 비춥니다

댓글0



한겨레

2014년 서울 청계광장 세월호집회에 참여한 고인(앞줄 오른쪽)과 필자(앞줄 왼쪽). 백기완재단 제공


‘거리의 불쌈꾼’ ‘이야기꾼’ ‘광대’ 등
그 모든 이름 너머 ‘민중해방의 꿈’
유신 말기 극심한 고문 고통에도
꺼지지 않던 눈빛 잊히지 않아
다섯해 지났어도 절망 빠진 이들
다시 세우는 힘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다음달 7일 마석모란공원 추도식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어느덧 다섯 해. 세월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지우는 법이지만, 이상하게도 선생의 모습만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목소리의 온기, 눈빛의 불꽃, 손끝의 떨림 하나하나가 더욱 선명히 되살아납니다. 마치 지금도 어딘가에서 백발을 날리며 검은 두루마기를 여미고, 주먹을 굳게 쥔 채 사람들 앞에 서 계신 것만 같습니다.



선생의 삶은 한 편의 불꽃이었습니다. 반독재 투쟁에서,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문화예술과 민중의 마당 한가운데서, 선생은 언제나 가장 앞에 서셨습니다. 사람들은 선생을 ‘거리의 불쌈꾼’, ‘당대의 웅변가’, ‘이야기꾼’, ‘광대’라 불렀지만, 그 모든 이름 너머에 선생이 지켜온 단 하나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말씀처럼, 선생의 모든 행적은 민중해방이라는 꿈 하나로 꿰어져 있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1979년 3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갔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방안의 음향장치를 통해 들려오던 흐릿한 울부짖음. 그 소리가 제 가슴을 멈추게 했습니다. 분명 선생의 목소리였습니다. 고문에 찢겨 나온 절규가 아니라, 어떤 고통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사자의 포효였습니다.



그해의 또 다른 기억. 고문을 견디다 못해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두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서대문교도소 복도를 걸어가시던 선생의 모습. 두 번 마주쳤습니다. 그때, 저는 ‘이러다 돌아가시겠구나’ 싶을 만큼 처연한 모습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눈빛을 보았습니다. 쇠약한 육신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개, 그것이야말로 선생의 혼이었습니다.





한겨레

2011년 한진중공업 1차 희망버스에 함께 참여한 고인(오른쪽 셋째)과 필자(맨 왼쪽). 백기완재단 제공


그 해의 체포와 고문, 그리고 옥중의 죽음 직전까지의 나날 속에서 가슴속으로 되새긴 말을, 선생은 1980년 12월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으로 세상에 내놓으셨습니다. 이름 없는 민중을 향해 “독재와 착취의 세상을 뒤집어 엎어라” 외친 이 시는,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행렬에서 이애주 교수가 춘 ‘바람맞이 춤’, 윤이상 선생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한국 민중의 영혼이 남긴 가장 눈부신 예술적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 1월, 혹한의 ‘희망버스’. 한진중공업 김진숙 동지가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00일이 지났을 때, 수많은 이들이 밤을 뚫고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저 역시 그 버스에 올랐습니다. 정문은 닫히고 밤은 깊었으나, 선생을 비롯한 몇몇 원로들이 맨 앞에서 담장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모두가 숨을 삼키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한진중공업 앞마당에서, 공장 정문 위로 올라 김진숙이를 살리자고 이름을 부르며 외치던 선생의 음성은 제 생애 가장 뜨거운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2010년 서울대 문화관에서 열린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 이야기’ 공연을 계기로 저는 선생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2021년 2월15일,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기까지 함께한 시간은 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민주화가 일정 부분 이뤄진 뒤, 많은 이들이 당신 곁을 떠났지만 저는 오히려 그 이후의 민중투쟁 속에서 당신과 마음을 더 깊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넘치는 민중적 감성과 지성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지배층의 달콤한 말과 공리공론을 거부하고, 밭일하는 아낙의 한숨, 노동자의 절규, 장삼이사의 웃음 속에서 진리의 말을 길어 올리셨습니다. 선생의 글에는 늘 살아 있는 인간의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책 속에서 빚어진 사상이 아니라, 거리와 현장, 눈물과 연대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였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었고,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시였습니다. 선생은 억눌린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았고, 분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릴 줄 아셨습니다. 선생이 꿈꾸던 세상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 일하는 이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노나메기(나눔과 연대)의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별빛은 여전히 우리의 길을 비추며, 얼어붙은 땅 위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들의 가슴을 데워 줍니다.





한겨레

2012년 ‘쌍용자동차 노동자 분향소’ 침탈에 항의하는 농성장에서. 백기완재단 제공


선생은 ‘전사 중의 전사’였고, ‘마당의 철학자’로 남으셨습니다. 공자가 군주의 스승이었다면, 백기완 선생은 민중의 스승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다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탐욕은 여전하고, 극우의 목소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자본의 사슬이 더욱 뻗어갑니다. 하지만 절망의 끝자락에서 언제나 희망은 피어났습니다. 그 희망의 작은 불씨, 바로 선생이 심어준 불입니다. 그 불길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선생님, 다섯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절망에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아직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깃발을 들 때, 그 깃발은 분명 선생이 들었던 그 깃발일 것입니다. 민중의 스승, 백기완 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백기완 선생 5주기 추도식-2월7일(토) 오전 11시 마석모란공원



김세균/백기완 노나메기재단 고문·서울대 명예교수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 주요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이 선택한 뉴스

  • 한겨레영천 화장품원료 공장 폭발 실종자 추정 주검 발견
  • 한국일보[속보] 조현상 HS효성 부회장, 김건희 특검 출석…'보험성 투자' 의혹 조사
  • 프레시안"기후대응댐? 대체 댐이 누구에게 좋은 겁니까?"
  • 동아일보[부고]‘노태우 보좌역’ 강용식 전 의원 별세
  • 이데일리VIP 고객 찾아가 강도질한 농협 직원…"매월 수백만원 빚 상환"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