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뉴욕 댄스&퍼포먼스 어워드(베시 어워드)’ 수상한 서울시무용단 '일무' 안무가 정혜진(왼쪽부터), 연출 정구호, 안무가 김성훈·김재덕이 26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베시 어워드는 ‘무용계 오스카’로 통할만큼 세계적 권위를 지녔다. 2026.01.26. pak7130@newsis.com |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정혜진 예술감독은 전통에 대해 전문가이시고, 또 컨템퍼러리 무용(현대 무용)에선 김성훈·김재덕 안무가가 계셨고, 또 일무 제작 때는 (김재덕 안무가가) 음악도 맡다 보니 다른 장르가 같이 충돌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냅니다." (정구호 연출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무용계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베시 어워드(Bessie Awards)' 수상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26일 오후, 뉴시스가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일무'의 주역 4인방을 만났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서울시무용단의 일무(佾舞, One Dance) 안무가 정혜진·김성훈·김재덕 안무가 3인은 한국 무용 작품으로 베시 어워드 최우수 안무가·창작자상을 거머쥐었다.
이번 신화를 일궈낸 창작진 중 총연출을 맡은 정구호는 '뉴욕 링컨센터 공연 당시 현지에서 평론가들의 평이 되게 좋았다"며 "참여했던 모든 무용수들과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멘트들도 많았다"고 떠올렸다.
이어 "일무가 시작부터 끝까지 다 군무다. 그 군무가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일치) 되기 쉽지 않은데, 그걸 다들 하셨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되게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며 "외국 사람들이 보기엔 되게 새로웠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일무'는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의식무(儀式舞)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군무의 정확성과 역동성, 집단의 에너지가 전면에 드러난다. 2022년 초연 이후 서울 재공연마다 매진을 기록했고, 2023년 7월 뉴욕 링컨센터 초청 공연에서도 전회차 매진을 달성했다.
정 연출은 종묘제례악이 가진 본질적인 정신은 지키되, 의상과 무대, 음악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비틀었다. 그 '낯선 조화'가 뉴욕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던 것.
일무의 성공비결…높은 '완성도'와 '본질' 집중
무엇보다 정 연출은 '일무'의 작품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 댄스 & 퍼포먼스 어워드’, 이른바 베시 어워드(The Bessies)에서 서울시무용단의 '일무'를 안무한 정혜진·김성훈·김재덕이 최우수 안무가·창작자(Outstanding Choreographer·Creator)’ 상을 받았다. 이날 김성훈(맨 왼쪽) 안무가와 정혜진 예술감독(맨 오른쪽)이 상기타 예슬리 베시어워드 총괄 디렉터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훈 안무가 제공) 2026.01.26. |
"제가 했던 것 중에서 제일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 분의 안무가들이 진짜 엄청난 노력을 해서 무용수를 트레이닝하고, 무용수들 역시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무용수들을 제가 처음 봤을 때와 나중에 무대에서 내려올 때 몸매가 달라졌어요."
아울러 창작진은 서로 다른 색깔의 '충돌과 조화'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본질 집중'을 수상의 핵심 동력으로 꼽았다.
정구호는 4명의 창작진이 개성을 지우고, 40명의 무용수가 한 사람처럼 움직이면서 집단의 질서·규율을 보여주는 '일무'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색깔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게('일무')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저는 전체적인 미장센 즉 그림을 그리고, 작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안무가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라며 "무용 동작이나 디테일한 움직임은 전적으로 정혜진 단장(전 서울시무용단장)과 두 안무가에게 맡겼다"고 했다. 자신의 역할을 '가이드'로 한정하고 무용 전문가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라는 것.
그러면서 "제가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던지면, 안무가들이 그걸 기가 막히게 동작으로 만들어 왔다. 서로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태클을 걸 시간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신뢰와 역할 분담이 빚어낸 '다름의 미학'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무용단 '일무(佾舞)' 연출 정구호(왼쪽부터), 무용수 김경애, 최태헌이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무용단 '일무' 시연을 마치고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국가무형문화제이자 유네스코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의식무인 일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2025.08.21. pak7130@newsis.com |
"갈등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역할이 너무 명확했으니까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들이라, 상대방이 해온 결과물을 보면 그냥 '오케이, 좋다'가 나오는 거죠. 그게 팀워크였던 것 같아요."
가장 전통적인 것을 지켜온 정혜진 단장에게 파격적인 현대 무용 안무가들과의 작업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통제 보단 신뢰를 택했다.
"사실 (김)성훈이랑 (김)재덕이, 이 둘이 너무 색깔이 달라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죠. 그런데 저는 그 '다름'을 적절하게 잘 버무리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굳이 하나로 맞추려고 하지 않았어요. 각자의 장점이 나오도록 그냥 뒀죠."
그는 또 "연출님(정구호)이랑 두 안무가랑 작업하는 게 저는 참 편했다. 서로가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제가 제작을 하고 안무는 이 팀이랑 해서 또 같이하고 싶어요. 사실 연출님이랑 '뭐 하나 더 하자'고 했는데 아직 못한 게 있어서 아쉽다"면서 웃었다.
김성훈·김재덕 두 젊은 안무가는 '종묘제례악'이라는 거대한 전통 앞에서 느꼈던 무게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사실 처음엔 막막했죠. 전통을 어디까지 건드려야 하나 싶어서요. 그런데 정구호 연출님이 시각적으로 아주 심플하게 길을 터주셨고, 정혜진 단장님이 '괜찮다, 해봐라'고 지지해 주시니까 용기가 났어요. 저랑(김성훈) 재덕 안무가가 스타일은 다르지만, '전통을 동시대로 가져오자'는 목표는 같았거든요."
"수상소식? 스팸인 줄 알았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무용단 '일무(佾舞)' 안무가 김성훈(왼쪽부터), 정혜진, 세종문화회관 안호상 사장, 연출 정구호, 무용수 김경애 최태헌이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무용단 '일무' 시연을 마치고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국가무형문화제이자 유네스코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의식무인 일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2025.08.21. pak7130@newsis.com |
이들의 '합(合)'은 수상 소식을 접한 반응에서도 드러났다.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혜진 감독은 "처음에 이메일 받고 '이거 조작인가?'했다. 완전한 서프라이즈였다"며 "우리가 작년에 공연했고 올해는 안 갔는데 상을 준다니깐.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우리 작품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게 참 뿌듯하더라"고 회상했다.
김성훈 안무가는 "메일이 왔는데 자세한 설명이 없고, 그냥 '후보자 지명을 축하한다'고만 써있었다. 스팸 메일이 온 줄 알고 처음엔 무시했다"며 웃으며 말했다.
이날 인터뷰 내내 네 사람은 서로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말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무'의 성공 비결은 무대 위의 칼군무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서로를 존중했던 이 '쿨한 태도' 덕분인 듯 했다.
"제 이름이요? 여긴 안무가 상이잖아요"
베시어워드 영광의 주인공은 안무를 맡은 정혜진, 김성훈, 김재덕 3인에게 돌아갔지만, 일무의 '설계자', 정구호 연출의 손에는 트로피가 없었다. 작품의 뼈대를 만들고, 의상부터 조명까지 모든 미장센을 진두지휘한 그로서는 아쉬울 법한 상황. 하지만 정구호는 특유의 직설적이고 쿨한 화법으로 이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에 받은 상이 '베시 어워드' 중에서도 안무가랑 크리에이터한테 주는 상이에요. 저는 연출(Director)이고 미장센을 담당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제 영역은 아니죠. 그래서 제 이름은 빠진 겁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무용단 '일무(佾舞)' 언론공개회가 열린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무용수들이 시연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국가무형문화제이자 유네스코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의식무인 일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기악과 노래, 춤을 말한다. 그 중에 제례무를 일컬어 '일무'라 하는데 하나로 열을 맞추어 춤을 춘다는 뜻이다. 2025.08.21. pak7130@newsis.com |
정 연출은 "'일무'라는 작품이 세계에서 통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무가들이 인정받았다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도 했다.
기업 후원과 김영숙 명인…숨은 조력자들
정구호 연출은 특히 일무의 숨은 조력자들에 대해서도 감사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대작은 국립단체에서도 만들기 힘들어요. 순수하게 작품성만 보고 투자해 준 기업(SK)이 없었다면 뉴욕 링컨센터 공연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냥 '좋은 작품 만들어달라',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써달라'며 묵묵히 뒤에서 밀어주셨죠. 그 뚝심 있는 지원 덕분에 우리가 예산 걱정 없이 완성도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해외 유수 공연들이 성공하는 건 이런 메세나(기업의 문화예술 후원)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라며 "SK의 사례가 한국 공연계에 좋은 선례가 되어 더 많은 기업이 순수 예술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전통의 뿌리를 지켜온 김영숙(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일무 전승교육사) 명인을 언급하며, 감사를 전했다.
"지난 향연 공연 당시, (종묘제례악) 일무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들다고 했었는데, 김영숙 선생님을 통해서 일무의 변화를 보게됐고 언젠가는 꼭 일무 공연을 하겠다고 했었거든요. 일무가 외국 사람이 봤을 때가 가장 현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국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립무용단 '일무' 안무가 김성훈(왼쪽부터), 정혜진 무용단장, 연출 정구호, 안무/음악 김재덕이 2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무용단 연습실에서 '일무' 공연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3.04.25. pak7130@newsis.com |
'일무', 한국의 '호두까기 인형'처럼…"살아있는 레퍼토리 만들 것"
이들의 목표는 상을 받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정혜진 감독은 '일무'가 서양 발레의 '호두까기 인형'처럼 매년 관객이 기다리는 '시즌 레퍼토리'가 되기를 꿈꾼다.
정 단장은 "해외 유수 무용단처럼 우리도 수십 년간 사랑받으며 계속 무대에 올려지는(Revival) 작품을 가져야 한다"며 "'일무'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겨울 레퍼토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계속 다듬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창작진은 이번 수상이 "한국 창작 무용이 티켓 파워를 가진 대중 예술로 도약하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정구호 연출은 "우리가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우리가 고민했던 그 현대화 방식이 뉴욕에서도 통했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이제는 '이게 한국이야'라고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것을 가지고 동시대적인 언어로 풀었을 때, 그들도(세계 관객도) 충분히 반응한다는 걸 확인했다"고 했다.
"세계가 주목하는데 예산은 제자리…'가성비' 예술 언제까지?"
수상의 기쁨 뒤편으로, 창작진은 한국 공연계의 척박한 현실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정작 제작 현실은 예산 부족과 싸워야 하는 '가성비 전쟁'이라는 것이다.
인터뷰 도중 정구호 연출은 "예산은 뻔하게 주어지는데, 요구하는 퀄리티는 어마어마하게 높다"며 "실질적으로 제작에 투입되어야 할 돈이 부족해 아이디어를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할 얘기가 더 있다. 무용이 발레의 예산의 약 5분의 1 밖에 안된다. 한국 무용이 발레 수준으로 예산이 올라가야 하지 않나. 무용수, 안무가, 연출 비용이 발레가 한국 무용보다 2~3배 더 높은 게 현실"이라며 한국 무용에 대한 정부나 기관의 지원이 열악한 현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외에서는 기업들의 메세나(문화예술 후원) 활동이 활발해 대작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인식이 부족하다"며 "복지 차원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순수 예술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업과 사회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dazzli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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