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근경인 암벽 바위는 실체감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중경의 왼편에는 아담한 마을도 보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은 담벼락 같은 산을 넘어 원경으로 간다.
원경은 운무와 산들의 아려한 속삭임. 산들의 능선을 더듬던 시선은 결국 보랏빛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대둔산’이라는 제목이 턱 하니 화면의 상단을 차지한다. 제목은 이 아련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방해한다.
제목의 타이포그라피는 둔탁하면서도 이채롭다. 조탁한 듯한 느낌의 글씨체는 자세히 보면 암벽이나 깎아지른 바위, 혹은 가파른 능선의 형상을 띄고 있다. 대둔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산의 형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동학농민혁명 최후항전지’라는 부제가 적혀있다.
임채욱은 한국의 산을 연구해 왔다. 설악산, 북한산, 무등산 등을 사진으로 담아왔고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산은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알고 있다. ‘오전 9시에서 낮 12시 사이, 청쾌한 날, 산의 정상에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특정 지점에 서서, 역광 상태로 사진을 찍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화된 이미지의 밀도나 고운 입자를 생각해보면 셔터를 10초 이상은 켜 놓는 ‘장노출’을 하지 않았을까.
임채욱의 산-이미지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첩첩의 산들이 푸른 그라데이션으로 장엄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 임채욱은 ‘한국 산의 전형적인 특징인 겹침의 미학, 쪽빛의 가치를 사진으로 담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한지’ 프린트로 마무리된다. 그의 작업이 사진이라는 점을 말해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한지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쪽빛 외에도 우리의 눈으로는 일상적으로 인지하기 힘든 오묘한 빛의 색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화된 산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구겨 입체감 혹은 공간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일종의 ‘사진-부조’같은 형태로 사진이라는 평면성으로 담기 힘든 특정 지형에 대한 ‘감정적인 굴곡감’을 형상화해 낸다. 이번 전시에서도 대둔산 미륵바위 근처 최후의 항전지가 갖고 있는 ‘고립감이나 절박함’을 두 개의 사진-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시는 모두 3부로 구성된다. 「1부 대둔산 : 첩첩산중」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그의 시그니처 기법으로 표현된 대둔산을 볼 수 있다. 「2부 대둔산 ; 동학농민혁명 최후항전지」에서는 눈이 살짝 내린 날카롭고 강퍅한 모습의 대둔산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 「3부 전봉준 부활 2025」는 전봉준과 동학의 정신을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부활’과 함께 광화문의 촛불집회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1부와 2부에서 대둔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1부의 대둔산이 현실감 없는 몽롱하고 이상적인 산, 관념적인 산이라면 2부의 대둔산은 겨울이라 잎사귀 한 장 없이 그대로 노출되는 산, 즉 산의 뼈와 골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최후의 요새였던 그곳의 물성과 동시에 시시각각 좁혀들어오던 위기감과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대둔산 마천대 아래 남서쪽에 위치한 미륵바위 부근에 30여명의 동학농민군은 움막을 짓고 1934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버텨내었다 한다. 고부에서 시작되어 무장에서 봉기한 민란이 백산에서 정비되어 체계적인 동학군으로 거듭났다. 내쳐 동학군은 황토현에서 크게 이기고 전주성까지 함락하지만 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2차로 봉기하여 서울로 진격했으나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의 신식 무기 등으로 대패한다.
대둔산은 우금치 전쟁 이후 피신하던 일부 동학군과 금산 지역의 동학군이 최후의 보루이자 다시 불씨를 지피기 위해 오른 곳이었다. 몇 차례 관군의 습격에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의 지형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층층이 겹쳐진 절벽으로, 사방이 깎아지른 듯’ 했기 때문이다.
결국 2월 18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진지는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농민군 가운데 29세 된 임산부를 포함하여 25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몇몇은 150m가 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 장소의 비극은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의 대둔산 등산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추후 원광대학교 사학과의 발굴조사작업을 통해 좀더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 속에서 임채욱의 전시 또한 맺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화에는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라는 개념이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실경이라고 한다면 진경은 무엇인가? 그 경치와 풍경이 담고 있는 진실, 혹은 정신(혼)까지 담아내는 것을 ‘진경’이라 한다.
임채욱 작가의 창작의 모태가 동양화인 점을 애써 밝히지 않더라도, 그가 ‘산’이라고 하는 한국적 정신의 ‘상징물’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임채욱은 물리적이고 조형적인 한국적 산의 풍광을 넘어 한국의 산과 사람들이 연루되어 온 그 ‘사건’과 ‘정신(혹은 정서)’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후기 진경산수화의 태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학의 시작과 전승은 주목되지만, 대둔산에서 있었던, 꼬박 100년간은 밝혀지지 않았던 비극은 또 하나의 동학이자 대둔산이다. 전시는 2월 22일까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정읍)에서 진행된다. 꼭 한번 방문해보길 권한다.
*본 글은 전시장 내 서문과 설명캡션, 도록 등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 전민정
지리산 하동에서 예술가유니온을 미술인들과 함께 운영하였고, 최근에는 부안군문화재단에서 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특정한 장소가 갖는 다층적 결이나 지역의 현안을 어떻게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방법으로 확장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독립문화기획자이다.
'문화 4人4色'은 전북 문화·예술 분야의 네 전문가가 도민에게 문화의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기고, 생생한 리뷰, 기획기사 등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경선 기자 doks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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