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한 지난 1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판결 직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효진 기자 |
[주간경향] “담배에 설계나 표시상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기망·은폐했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 1월 15일 서울고법은 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이 “담배로 인해 국민 건강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며 담배회사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2020년 1심에 이어 두 번째 패소다. 이날 선고 이후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지금은 누구나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는 사실을 아는데, 이 유해성에 대해 유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정말 비통하다”고 말했다.
법원이 담배회사의 사회적 책임 및 담배와 유해성의 관계에 대해 재차 미온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향후 정부의 담배 규제 정책 및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소극적인 판단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보 전진했으나 이어진 패소
그간 국내에서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건보공단의 소송 이전에도 담배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개인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있었다. 건보공단 소송의 경우 최초로 공공기관이 직접 원고로 나선 담배 소송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을 받았다.
건보공단이 담배회사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2014년이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2011년 흡연 관련 35개 질환으로 인한 총진료비는 1조6914억원에 달하며, 이는 같은 해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 46조원의 3.7%를 차지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흡연 관련 질환은 45개로 늘어나 이로 인한 총진료비는 2021년 기준 약 3조5000억원으로 2배가량 증가했다. 건보공단은 “흡연은 흡연자 개인의 질병 발생과 경제적 부담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흡연으로 인해 증가한 의료비는 결국 건강보험이 책임지는 구조”라고 했다.
2014년 건보공단은 30년 이상, 20갑년(하루 한 갑씩 20년) 이상 담배를 피운 뒤 흡연과 연관성이 높은 폐암(편평세포암·소세포암)과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 대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지급한 건강보험 진료비 약 533억원을 손해배상액으로 업계 1~3위 담배회사에 청구했다. 하지만 2020년 11월, 1심 재판부는 공단의 청구를 기각하며 흡연과 암 발병 사이 인과관계나 담배의 설계·표시상 결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대한폐암학회 등 암 관련 26개 학회 협의체는 “흡연은 폐암의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임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담배회사에 실질적인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재판은 단순한 배상을 넘어 공중보건과 사회정의를 위한 헌법적 판단의 장”이라는 공동성명을 낸 바 있다.
건강보험공단이 담배 소송 지지 서명 진행 상황을 알리며 공개한 웹포스터. 건강보험공단 |
원고패소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이번 2심 판결은 1심 판결에 비해선 일부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평도 있다. 흡연과 해당 질병 발병 간의 인과관계와 관련해서는 상대적으로 전향적인 판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서울고법 재판부는 “원고(건보공단) 주장과 같이 흡연과 폐암 등 발생 사이 역학적 상관관계가 인정되고, 이 사건 대상자들이 30년 이상 20갑년 이상 흡연력을 가진 자들로 폐암 또는 후두암 진단을 받은 점 등의 사정을 비중 있게 고려해 개별적 인과관계를 판단함이 상당하다”고 했다. 다만 “피고(담배회사)들의 불법행위가 증명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상, 이 사건 대상자들의 흡연과 폐암 등 발생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에 관하여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반면 과거 1심 판결에서는 “어느 위험인자와 어느 질병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있다고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이 걸린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가 판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폐암을 ‘비특이성 질환(특정 요인이 아닌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질병)’으로 판단하며 “대상자들이 흡연을 했다는 사실과 이 사건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해 그 자체로서 양자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개연성이 증명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명승권 국립암센터 교수(한국금연운동협의회장)는 “2심 판결의 중요한 부분은 여러 요인이 작동할 수 있기에 면밀히 봐야 하지만 결론적으로 흡연으로 인한 이유가 상당하다고 표현했다는 점”이라며 “여전히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일단 (흡연과 질병과의 연관관계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문제로서의 흡연
“그런데 이번 (건보공단) 판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담배를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하다는 의미죠.”
이성규 국가금연지원센터장은 지난 1월 19일 2심 결과와 관련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배 문제’와 관련해 유독 한국에서는 ‘흡연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수많은 흡연자를 만나며 가장 많이 들어왔던 말이 ‘흡연은 결국 내 탓’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담배회사가 꾸준히 강조하고, 1심 재판부가 강조했던 부분도 “흡연 개시·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정말 흡연은 개인의 자유 의지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명 교수는 “담배업계는 담배를 끊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흡연자들이 그것을 시작하는 것도 자유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단순히 의존성이 있다’, ‘끊기 어렵다’라는 말 정도로는 중독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에 따르면 흡연자의 1년 금연 성공률이 3~5%에 불과하고 금연보조제 등 약물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성공률이 30%를 넘지 못한다”며 “처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그런 심각한 중독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개인 등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한 적이 없지만, 해외에선 담배회사의 이익보다 국민의 건강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1998년 미국의 ‘MSA(Master Settlement Agreement)’다. 1994년 담배회사 연구원인 내부고발자가 그간 담배업계의 기만적인 마케팅 행태를 담은 수백만 페이지의 문건을 공개하면서 46개 주정부가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진료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담배회사들은 주정부에 총 2060억달러를 배상하게 됐고, 추후 담배 광고 및 판매 제한 등에 강도 높은 규제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다.
캐나다의 경우 1997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가 특별법을 제정해 주정부가 개별 환자의 특정 없이 집단적 통계적 증거만으로 담배회사에 의료비 구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캐나다 대법원은 이 특별법의 합헌성을 인정하면서 공공보험자가 통계자료만으로도 손해를 추정해 담배회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18년에 걸쳐 담배회사들로부터 배상금 37억달러를 받기로 합의해 이를 암 치료와 연구 등 공공의료 자원으로 투입했다. 이 밖에도 지난 2024년 10월 캐나다 퀘벡에서는 담배회사들이 소비자들에게 제품의 위험성을 충분히 경고하지 않았다는 판결로 인해 10개주 등에 의료비용 회수 등의 명목으로 248억달러의 합의금을 지급하게 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담배 소송의 법적 쟁점과 해외 사례 비교’(2025) 논문을 작성한 경기도 공공보건의료지원단 박지원 주임연구원은 “미국 등 해외에선 (흡연과 질병 관련) 집단적 통계에 기반한 담배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반면 한국의 경우 여전히 개인차 및 병의 종류를 강조하고, 폐암 등을 흡연자 개인의 생활습관 등의 문제로 바라보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 담배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
사회적 책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전문가들은 담배를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고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선 단순한 예방이 아닌 적극적인 규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표적인 게 담뱃값이다.
한국을 포함한 183개국이 가입된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 따르면 정부는 세금(담뱃값), 정책 등을 통해 금연을 적극 유도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담뱃값이 10% 인상될 경우 담배 소비가 약 4% 감소해 가격 인상이 가장 효과가 큰 금연 정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WHO 세계흡연실태보고서(GTE)에 따르면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담배가격은 9869원인데 비해 한국의 담배가격은 4500원으로 절반도 안 된다. 국가 차원에서 계획을 수립해 물가 연동방식 혹은 정기적으로 담뱃값을 올려온 호주, 뉴질랜드,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과 달리 한국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이후 한 번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해외의 경우 흡연율 저하를 위한 정책적 시도도 다양하게 이뤄진다. 호주,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은 무광고표준 담뱃갑 제도를 도입해 포장 디자인을 표준화하고, 경고 그림이 85% 이상을 차지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경고 이미지는 30%, 경고 문구는 20%가 의무이며 포장 및 브랜드 디자인 등에서 차별화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산업 진흥보다 국민 건강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홍준 서울아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등은 ‘새 정부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담배규제 정책’(2025) 논문에서 ‘담배 및 니코틴 제품 관리법(가)’을 신설해 궐련 외에도 새로 등장하는 전자담배, 가열담배, 니코틴 함유 제품 등을 포괄해 규제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규 센터장은 “현재의 담배사업법은 국민의 건강권보다 담배 산업 진흥에 초점을 맞춘 법”이라며 “해외 주요국처럼 국민의 건강권을 중심에 둔 적극적인 규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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