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듣고 있다. AFP연합뉴스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 무대에 반사형 조종사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등장하자 국제 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행위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일각에서는 그린란드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맞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상징적 행보로 받아들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 일부 참석자들이 마크롱 대통령의 선글라스를 영화 <탑건>의 주인공 매버릭에 빗대며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장악 시도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신호로 해석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조롱해 온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조종사형 선글라스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라며 일종의 풍자로 보기도 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마크롱의 선글라스가 서방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내놓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후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를 의식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보스에서 “어제 그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걸 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강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결막하출혈로 오른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이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의 선글라스 사진은 전 세계 주요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그가 착용한 선글라스 브랜드 앙리 줄리앵(Henry Jullien)을 소유한 이탈리아 기업의 주가는 밀라노 증시에서 급등했다. 이 회사는 단종됐던 해당 모델의 생산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 장면은 지도자의 선글라스가 단순한 소품에서 정치적 상징으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다. 정치권에서 선글라스는 오래전부터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활용돼 왔다.
2022년 5월 18일(현지시간)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 도착해 손을 들고 인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외신들은 바이든 전 대통령이 10대 시절부터 레이밴 보잉 선글라스를 착용해 왔다는 점에 주목해 왔다. 이는 그가 강조해 온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 출신의 중산층 정치인’ 이미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보잉 선글라스는 본래 미 공군 조종사를 위해 설계된 제품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권위, 20세기식 전통적 남성성을 상징한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이 정장을 차려입고도 선글라스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여전히 평범한 미국인들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2021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조종사용 안경을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백악관은 이 제품이 전투기 조종사 선글라스를 생산하는 미국 랜돌프(Randolph)사에 주문해 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선글라스가 언제나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2021년 당시 바이든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예방했을 때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인사한 장면은 논란을 불러왔다. 찰스 왕자의 전 집사였던 그랜트 해럴드는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이를 왕실 예법을 어긴 결례라고 지적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생전에 “내 미래가 너무 밝아서 선글라스를 쓴다”고 말했다. |
권위주의 체제에서 선글라스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많은 독재자에게 선글라스는 감정을 숨기고 위압감을 조성하는 도구였다. 시선을 차단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불확실성과 공포를 남기는 장치로 활용된 것이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등이 대표적 사례다.
카다피는 거의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표면적으로는 시력 보호와 노화 은폐가 이유였지만, 정치적 메시지도 분명했다. 그의 주치의였던 브라질 출신 의사 리아시르 리베이로는 BBC 인터뷰에서 “카다피는 밤에도 선글라스를 썼는데 이는 수술 후 붓기를 가리거나 눈가 주름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카다피는 생전에 “내 미래가 너무 밝아서 선글라스를 쓴다”고 말한 바 있다.
2023년 11월 3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딸 주애가 항공절(11월 29일)을 맞아 조선인민군 공군사령부 등을 방문했을 당시 나란히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북한 지도부의 선글라스 역시 상징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선글라스를 자주 착용해 왔다. 특히 2023년 11월 김 위원장과 딸 주애가 공개 석상에서 명품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포착되며 주목을 받았다. NK뉴스는 주애가 구찌 제품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는 북한 당국이 ‘부르주아 문화’와 ‘반사회주의적 행위’를 강하게 단속하고 있는 상황과 대비된다. NK뉴스는 이와 관련해 지위 과시와 권력 재현의 수단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선글라스는 지도자의 성격과 정치적 맥락, 체제의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군가에게는 친근함의 상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공포와 위압의 장치가 된다. 작은 렌즈 너머로 권력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순간 선글라스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정치적 언어로 변한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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