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천년 신라를 닮고 싶었던 고려, 이야기를 켜켜이 쌓았다[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댓글0
‘당대 유행’ 다 모은 고려 신화
경향신문

광여도 중 개성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개성 고지도. 곳곳에 고려 왕실의 설화와 관련된 장소들이 표시되어 있어, 이야기의 힘을 짐작하게 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언니가 꿈을 꾸었다. 뒷산에 올라 오줌을 누자 온 고을이 오줌에 잠기는 꿈이었다. 다음날 아침, 재밌는 꿈을 꾸었다며 얘기를 들려주는 언니에게 내가 그 꿈을 사겠다고 했다. 언니가 뭘 줄 거냐고 묻길래 아끼던 비단 치마를 주겠다고 했다. 흔쾌히 꿈을 팔고 신이 난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보통 꿈이 아니거늘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 같으니라고.’ 얼마 후 귀인이 집을 찾았는데 하필 옷자락이 찢어져 버렸다. 아버지가 언니에게 귀인의 옷을 꿰매라 했으나, 결국 언니 대신 내가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귀인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익숙한 이야기인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보희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언니 보희의 꿈을 비단 치마로 산 문희가 언니 대신 김춘추와 연을 맺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후 아내가 되는 바로 그 이야기. 훗날 신라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이는 고려 왕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려 왕실의 건국 설화를 담고 있는 <고려세계>에는 작제건의 어머니이자 보육의 둘째 딸 진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신라 술사가 와서 (마하갑에 있는 보육의 집을) 보고 이곳에서 살면 반드시 당나라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보육은 두 딸을 낳았는데, 막내 진의가 아리땁고도 지혜와 재주가 많았다. 진의의 나이가 열다섯 정도일 때, 그의 언니가 오관산 봉우리에 올라 소변을 보았는데 천하에 흘러넘치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서 진의에게 말하자, 진의가 “비단 치마로 그 꿈 살게요”라고 하였고 언니가 허락했다.”(고려사 <고려세계>)

술사의 예언대로 과연 훗날 당의 황제가 될 왕자가 우연히 개성을 찾았다가, 보육의 집까지 이르렀다. 이 사람이 술사가 예언한 그 귀인임을 알아본 보육은 큰딸을 시켜 터진 옷을 꿰매 주라고 했으나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나서 못 가게 되고, 진의가 대신 하게 되었다. 당의 왕자는 한 달 후 떠났으나 진의는 그의 아이를 가졌다.

임신 후 두 여인의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여기까지 두 이야기는 놀랍도록 닮았다. 고려는 신라에서 전해지던 이야기를 베꼈다.

짜깁기한 신화들

고려 왕실의 신화 베끼기는 진의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진의와 당나라 왕자 사이에서 태어난 작제건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얘기해주던 어머니는 그가 열여섯이 되자 드디어 진실을 말해주며, 아버지가 남겨 준 활과 화살을 전했다. 그 활과 화살로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얼마 가지 않아 작제건은 신궁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아버지를 꼭 뵙고 싶던 작제건은 서해로 나가는 상선에 의지해서 중국에 가고자 했다. 그러나 바다 한복판에서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며 주변이 자욱해지더니 배가 멈춰버렸다. 사흘째 되던 날 참다못한 뱃사람들이 점을 쳤다. ‘고려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는 점괘. 작제건은 활과 화살을 거머쥐고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다행히도 마침 물결 아래 가려져 있던 바위에 안착했다. 그가 내리자 상선은 쏜살같이 목적지를 향해 떠나 버렸다.

이는 모두 신궁의 도움이 필요했던 서해 용왕의 계략이었다. 서해 용왕은 작제건의 도움을 받아 그를 괴롭히던 늙은 여우를 퇴치했고, 이를 계기로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혼인하고 갖은 보화를 가지고 개성으로 돌아온다.

작제건의 이야기는 신라의 거타지 이야기와 거의 동일하다. 거타지는 신라 진성왕대 당나라 사신길에 동행한 궁수로 작제건과 매우 흡사한 여정을 걷는다. 그 역시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후 서해신의 부탁을 받고 늙은 여우를 퇴치한다. 서해신은 거타지에게 보답으로 딸을 주고, 거타지가 탄 신라 사절단의 배를 용 두 마리로 보호하여 당나라까지 무사히 가게 한다.

온 천하가 오줌에 잠기는 꿈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한 신궁
신라 설화이자 고려 왕실의 것

태조 왕건은 천안을 건설하며
개성 근처 ‘오룡사’ 창건하고
곳곳을 의미 있게 만들려 노력

수백년간 쌓인 서사가
공간을 ‘장소’로 직조해
조선에도 영향력 미쳐

원래 신화는 비슷한 모티브들이 약간씩 변주하며 여기저기 옮겨 전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고려 왕실 신화와 신라의 이야기에 유사한 대목이 나타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신화라 할지라도 조금은 체계적이고 일관되면 멋이 있을 텐데, 고려 왕실의 신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조상의 계보가 아버지면 아버지, 어머니면 어머니로 일관되게 내려오는 것도 아니요, 하나의 장소가 일관되게 중요하게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경향신문

거산 천흥사명 동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이 동종은 고려 현종대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천안의 성거산 천흥사에 있었다. 태조 왕건이 이 산에 행차했을 때 오색구름이 일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이름 붙이고 천흥사(天興寺)를 창건했다. 흥미롭게도 성거산은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산신이 된 개성 북쪽의 산에 붙은 이름이기도 하다. ‘천흥’ ‘천안’이라는 이름은 모두 하늘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하고 흥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국가유산포털 제공

설화 안에서 같은 모티브가 중복되기도 한다. 온 천하가 오줌에 잠기는 꿈은 진의의 언니만 꾼 것이 아니고 그 아버지 보육도 꾸었다. 풍수의 술사라고 하면 집터를 점지해주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도선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 이전에도 신라의 술사라는 인물이 여럿 등장하고 그들이 점쳐준 곳이나 예언도 여럿 전한다. 한마디로 고려 왕실의 신화는 여러 이야기를 덕지덕지 짜깁기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만약 신화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대회가 있다고 한다면, 고려 왕실의 신화는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 듯하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신성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특별한 이야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시대에는 자신의 왕실을 하늘에 직접 접속시켰다. 이 나라 모두 하늘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시조 설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시조의 행적과 관련한 신성한 장소들이 전한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시조나 후대 왕실뿐만 아니라, 곳곳에 그 이후의 오랜 역사가 축적된 이야기들을 품은 신성한 장소였다. 사후에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닷속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문무왕 대왕암이라든지, 그 용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탑이라든지, 김현이 호랑이 처녀를 만난 흥륜사 같은 곳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해 고려가 건국될 무렵은 하늘과 직접 접속시키는 시대가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대신 자신의 지역을 신성하게 하는 다른 요소들이 유행했는데, 산천신이나 풍수, 불교 등이 대표적이었다. 지역세력들은 산신으로 추앙을 받거나 유명한 승려들을 초빙하여 절을 짓는 등 자신들만의 상징성을 갖추어 지역을 현창하려고 했다. 몇백 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 역시 지역 세력들이 과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궁예처럼 신라 왕실의 후손을 자처한다든지, 신라의 관직을 참칭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되겠다.

고려 왕실의 신화에는 당대에 유행한 이러한 모든 요소가 엿보인다. 구룡산의 산신, 백두산부터 산맥을 짚으며 터를 보는 풍수 술사들, 신라 관료 출신의 예언, 당나라 황실, 서해 용왕의 딸 등이 대표적이다. 작제건의 아내가 된 서해 용왕의 딸은 훗날 고려 왕실이 용의 자손을 칭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고, 고려 왕족의 몸 어딘가에는 용 비늘이 있다는 설화로 조선 후기까지도 그 흔적이 남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서 고려의 왕실이 결국 당나라 황실의 후손임을 자처한 대목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조상의 연원을 당나라의 어느 한 자락에 대는 것은 고려 왕실만의 일이 아니었다. 고려 중기 정계를 쥐락펴락한 이자연의 집안, 인주 이씨는 선조가 신라의 높은 관원이었는데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황제가 이씨 성을 하사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귀족 중에도 당나라와 연결된다는 집안 내력을 내세운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던 당나라가 멸망 후에도 동아시아 전반에 상당한 역사적 권위와 상징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민족·국가별 장벽이 높은 시대의 감각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이야기는 실질적인 행위로도 이어진다. 태조 왕건은 유명 승려를 초빙하여 개성 주변에 ‘오룡사’라는 절을 창건한 바 있다. 여기에서 ‘오룡,’ 즉 다섯 마리의 용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이는 천안부를 둘 때의 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천안은 태조 왕건이 처음 건설한 도시다. 주변의 목천이나 직산이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원을 지닌 데 비해 천안은 역사가 짧은 셈이다. 당시 왕건은 후백제를 공략할 거점으로 천안을 주목했다. 이곳이 ‘삼국의 중심으로 오룡이 구슬을 두고 다투는 형세’라서, 도시를 설치하면 백제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예언이 유행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볼 때 아마도 당대에는 ‘오룡이 구슬을 두고 다투는 형세’가 삼국을 통일하게 할 지세라고 하는 예언들이 유행했고, 이를 염두에 두고 왕건이 자신의 고향 개성에도 이름을 딴 절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이야기는 왜 이렇게 중요한가? 이야기가 없이는 어떤 ‘공간’도 의미를 지닌, 인간의 ‘장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의 서라벌 곳곳이 의미로 가득 찬 장소였을 때, 신흥 왕조 고려에서는 당대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동원하여 개성을 의미 있게 만들려고 했다. 아무래도 역사가 짧은 개성만으로 역부족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고구려의 수도라는 내력을 지닌 평양을 새삼스레 다시 발굴해내기도 했다. 이후 475년의 역사는 개성을 의미로 가득 찬 장소로 직조해냈고,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인들은 그 의미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했다. 수백 년간 층층이 쌓인 서사의 무게가 그만큼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간을, 도시를, 그저 물리적인 형태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본디 그 너머의 의미와 이야기를 갈구하는 존재다.

경향신문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주요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이 선택한 뉴스

  • 뉴시스'관광 100선'으로 기억하는 광복…문체부, 독립기념관·대구서문시장 등 소개
  • 중앙일보손질 걱정 없이, 집에서 간편하게 전복 요리 도전해요! [쿠킹]
  • 연합뉴스조계종 종정 "폭우에 신음하는 이웃에 따뜻한 손 될 수 있느냐"
  • 머니투데이"일상에서 느끼는 호텔 품격"…롯데호텔, 욕실 어메니티 출시
  • 이데일리미디어아트로 만나는 국가유산…전국 8개 도시 개최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