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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을 죽인 작가 카뮈에게, 침묵하는 신에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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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 왼쪽)와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활동하는 작가 카멜 다우드(50). 위키미디어코먼스·민음사 제공


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



한 남자가 해변을 걷다가 아랍인을 마주친다. 아랍인의 손에 든 칼, 그 칼날에 부딪힌 태양 빛이 남자의 이마를 때린다. 남자는 총을 꺼내 아랍인을 죽인다. 너무도 유명한 ‘이방인’의 한 장면이다. 작가는 알베르 카뮈, 주인공은 뫼르소, 범행 동기는 태양이다. 그렇다면 죽은 아랍인은 누구인가?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당신의 기억력 탓이 아니다. 애초에 이름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 없는 망자보다 더 모호한 것은 ‘아랍’이라는 정체성이다. 아랍이란 무엇인가. 인종인가, 국적인가, 언어인가. 그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이 될 수 없다.



카뮈의 작품에서 아랍은 부조리의 조건이다. 태양, 무더위처럼 세계 안에 있으나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노골적인 배제라기보다는 거리의 표현에 가까웠을 것이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로 사유한 작가의 시선이 닿을 수 있었던 한계일지도 모른다.



카멜 다우드는 카뮈가 좁히지 못한 그 거리에 문을 하나 낸다. 새로운 입구다. 이제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가 아니라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다”로 시작된다. 입구가 바뀌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질까.



다우드의 문을 열면 뫼르소가 아니라 아랍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은 아랍인의 동생이자 또 다른 아랍인, 하룬의 목소리다. 하룬은 낯선 청자를 향해 말을 건네며 형의 죽음을 반복해서 되짚는다. 그는 법정이 아닌 술집에서, 가해자가 아닌 남겨진 자의 목소리를 낸다. 카멜 다우드의 소설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의 형식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그 형식이 비워두었던 자리를 드러낸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카뮈와 알제리에서 태어난 아랍인 다우드는 이렇게 알제의 해변에서 마주한다. 전자는 뫼르소의 시선으로, 후자는 아랍인의 목소리로. 다우드는 카뮈처럼 아랍과 거리를 둘 수 없다. 그 자신이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랍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한 작가가 글을 쓰는 자리다.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한 일간지의 칼럼니스트이자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프랑스어로 알제리 사회를 비판해 온 그는 반복적인 협박과 공개적인 위협의 대상이 되었고, 사법 절차를 거친 뒤 현재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우드가 알제리에 있든, 파리에 있든 그의 글이 늘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알제리에서 다우드는 종교와 국가, 혁명의 이름으로 봉인된 말들을 꺼내놓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신의 뜻과 국가의 서사를 의심하는 태도는 알제리 사회 안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화가가 재현한 에로티시즘을 사유할 때조차(이 경험을 바탕으로 ‘여자를 삼킨 화가, 피카소’를 썼다), 서구 예술의 내부자가 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미술관이라는 제도나 천재 예술가의 신화가 아니라, 욕망이 어떻게 반복되고 자연화되는가 하는 문제다. 욕망을 사는 내부자가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그는 서구 예술의 중심부에서도 여전히 바깥에 머문다.



다우드의 자리는 바깥이다. 그의 언어는 내부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 것, 다시 말해 신과 예술, 영원 같은 말들이 어떻게 질문을 멈춘 언어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그의 질문이 구체적인 서사로 드러난 작품이 바로 ‘뫼르소, 살인사건’이다. 이 소설에서 ‘신’ ‘정의’ ‘혁명’은 위로의 언어나 삶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하룬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침묵일 뿐이다. 하룬은 형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술집 한구석에서 낯선 청자를 붙들고 이미 끝난 사건을 다시 말할 뿐이다.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에서 가능한 유일한 말하기는 반복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하룬의 반복은 대답 없는 신과 아랍인을 죽인 작가, 카뮈를 향한(소설의 세계에서 작가는 하나의 신이다) 질문이다. 그의 말은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판결도 없고 구원도 없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왜 이 죽음은 설명되지 않아도 되었는지를 되짚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룬을 뫼르소의 반대편에 선 인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뫼르소와 닮아 있는 아랍인이며, 다우드의 작품 속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의 이름 없는 아랍인과 닮은 프랑스인이다. 이것이 다우드의 다시 쓰기다. 정의를 회복하거나 이야기를 바로잡는 대신, 서로를 비추며 닮아가는 과정에서 끝내 구원받지 못하는 것들을 독자에게 남기는 것.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



한겨레

신유진 작가

카멜 다우드는 “문학은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그 세계를 우리 안으로 데려온다”고 했다. 이방인과 아랍인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만의 감각, 질문이 된다. 세계의 부조리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내면은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내면이 바뀌면 무엇이 달라질까. 분명한 것은 무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한쪽으로만 열린 문처럼. 문을 연 순간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다. 이제 나아가야 한다. 설명되지 않은 삶으로부터 질문으로, 질문에서부터 조금 다른 삶으로.



신유진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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