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과 금자문자(가네코 후미코). 당시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유출되면서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
1926년 1월 일본 도쿄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 수감 중인 24세 박열(朴烈·1902~1974)은 재판장에게 4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문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박열은 지난 십팔일에 목야(牧野·마키노) 재판장에게 신청서를 제출하고 공판정에서는 일절 죄인 취급을 중지하되 피고 등의 용어를 쓰지말 일, 그리고 공판정에서 조선의례복을 입을 것을 허가하여 주고, 앉을 자리도 재판장과 똑같이 높게 앉게 할 것과 공판을 개시하기 전에 자기의 선언문(宣言文)을 낭독할 것을 허가하라고 요구하고 만일 이를 허가치 않을 때에는 자기는 입을 다물고 심문에 응치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함으로 재판장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른다더라.”(1926년 1월 20일 자 2면)
1926년 1월 20일자 2면. |
박열은 “일본 황실에 대한 불경 사건” 혐의로 1923년 9월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일왕(천황)과 왕세자(황태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일본인 연인 금자문자(金子文子·가네코 후미코)도 함께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재판에 임하는 박열의 대담하고도 당당한 태도, 동지이자 연인인 금자문자와 옥중 결혼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둘은 조선 옷을 입고 재판정에 나왔다. 박열은 재판장에게 반말로 하대하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오전 여덟시 사십분이 되자 보라빛 조선 관복에 검정 사모를 쓴 박열과 조선 흰옷에 금테 안경을 쓴 문자(후미코)는… 조금도 초조한 빛이 없이 호위하는 간수와 같이 수많은 방청자의 늘어앉은 사이를… 사방을 훑어보며 입정하였다.”(1926년 2월 27일 자 석간 2면)
박열 관련 기사. 1926년 3월 3일자. |
조선일보 동경 특파원 이석(李奭)은 ‘박열 공판 방청기’를 6회에 걸쳐 자세히 전했다.
“신랑처럼 꾸민 박열과 조선옷 입은 금자(가네코)가 한자리에 짝지은 비둘기 모양으로 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초례청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아니하였다.
재판장은 개정함을 선언하고 피고 박열의 심리부터 시작하야 문, 성명이 무엇인가라고 물은 즉 박열은 앉은 채로 답, 박열이야 라고 조선말로 대답하매 재판장은 다시 문, 그것은 조선말이 아닌가 일본말로는…라고 물은 즉 박열은 다시 그의 독특한 유창한 일본말로 답, 박열이라 쓰기도 하네. 문, 본명은 박준식이 아닌가. 답, 아모게나 다 좋겠지. 문, 나이는 얼마인가. 답, 잘 몰라. 문,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답, 누구든지 자기 나온 때를 아는 사람은 없겠지. 문, 직업은 무엇인가. 답, OOOOO일세. 문, 잡지도 발간한 일이 있지. 답, 글쎄…. 문, 주소는. 답, 물어볼 것도 없이 시곡(市谷·이치가야)형무소. 문, 출생지는 어디인가. 답, 출생지도 게서 나왔는지 모르지. 문, 신분은 양반인가? 답, 신양반(新兩班)이지.
상기와 같이 모두가 반항뿐이매 재판장도 빌다시피 하면서 심문을 하자니까 자연 땀이 날 지경일 뿐만아니라 전일 조건부 약속에 의하야 ‘피고’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그편’ 이라고 묻게 된 것에 의하야 보더라도 당일 법정의 질서는 가히 짐작할 것이다.”(1926년 3월 3일 자 석간 2면)
박열은 법정에서 1시간에 걸쳐 20여 장 원고로 쓴 ‘나의 선언’을 낭독했다. 특별 방청석 150명 중 조선인은 조선일보 특파원 이석뿐이었다.
“특별방청석에 한하야 약 일백오십명의 전부가 일본인이오, 조선인이라고는 나(특파원) 한 사람뿐인지라 나에게 향하야 묵례(默禮)로 인사를 하는 고로 나도 역시 답례를 하매 그는 저윽이 안심한 듯이 착석을 하게 되엿다. (중략) 선언문의 낭독을 마친 후 피가 끓는 가슴을 진정하고 땀이 흐르는 얼골을 수건으로 씻은 후 차를 마시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착석하야 무엇인지 심사묵고(沈思默考)하는 모양은 그가 비록 중대범일망정 그를 심문하는 사법관까지라도 그의 장렬한 기개에는 저윽히 놀램을 말지 아니하는 듯 하얏는데 특별방청석의 일본인들은 그의 민활한 재간과 명쾌한 두뇌를 칭찬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1926년 3월 4일 자 석간 2면)
'문제의 박열 사진이 배포된 경로'. 1926년 8월 26일자. |
박열은 휴정 시간에 금자문자에게는 따뜻한 말로 위로했다.
“공판이 잠시 휴정됨을 따라 대심원 특별실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박열 부부의 태도를 보건대 아침부터 정오까지 심지가 격동되었든 박열도 애인 금자를 돌아다보고 “매우 피곤하지오”라고 웃음의 빛이 넘치는 얼골로 물으매 “나는 괜찮어요. 참 퍽 피곤하시겠어요”라고 어여쁜 얼골, 앵도빛 같은 입속을 열어 나직한 말소리로 애교를 흘리면서 대답하니 “무얼 그까지걸이요. 염려마서요”라고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양은 그들의 손목에 매인 쇠사슬을 끌고있는 간수들까지도 이에 융합되여 “오래간만에 만나시니까 반가우시지오”라고 ‘빙그레’ 웃는 얼골로 수작을 부치다가…”(1926년 3월 4일 자 석간 2면)
특파원 이석은 기사 끝에 박열과 금자문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감동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그들은 범죄에 있어서도 세계의 이목을 놀래였을 뿐만 아니라 연애에 있어서도 세계적 승리자라 할 수 있으매 피차 손목을 이끌고 교교한 월색과 난만한 꽃구경을 다시 한 번 하지 못하게 됨만은 유한이라 할까 모르거니와 두 사람 사이에 굳고 깊은 사랑의 정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것이다.”(1926년 3월 4일 자 석간 2면)
박열과 금자문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화제는 재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옥중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중범죄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자유롭고 발랄한 모습이었다. 박열이 책상에 턱을 괴고 의자에 편히 앉아있고 금자문자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금자문자의 사진을 재연했다. |
사진은 예심 법정에서 판사인 다테마쓰(立松)가 찍은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은신한 다테마쓰 판사를 수소문해 찾아가 사진을 찍게 된 사정을 보도했다.
“이미 자기가 사형이라는 것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던 문자는 이생의 한 기념으로, 일변은 아직도 자기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시집 즉 박열의 친가(親家)에 둘이 함께 박힌 사진을 보내겠다는 의사로써 박열과 함께 입송(立松·다테마쓰) 판사에게 청을 하기에 이르자 입송 판사는 처음에 이를 거절하얐으나 누차 청함을 또한 어찌하지 못하야 그청을 듣기로 하고 칠월구일 예심정에서 박이기에 이른 것인데…”(1926년 8월 26일 자 조간 2면)
금자문자는 둘의 사진이 조선에 알려지기 직전인 1926년 7월 23일 옥중에서 의문사했다. 23세였다. 일제 당국은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박열은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 22년 2개월 복역 끝에 석방됐다. 1949년 귀국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됐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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