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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자본론’ 읽었다고 불법구금 뒤 기소유예…46년 뒤 검찰에 ‘취소’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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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검찰청이 지난 1983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송치됐던 이동섭씨와 고 박광순씨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승인한 기록. 이동섭, 유현숙 제공


20대였던 1980년대, 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을 읽었다는 이유로 20여일간 불법 구금됐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70대 피해자와 유족이 검찰에 “직권으로 불기소처분을 내려 달라”며 진정서를 냈다. 검찰 단계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자신들은 법원에서 재심조차 받을 수 없어, 검찰이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다는 취지다. 같은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또 다른 피해자는 지난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 받았다.



이동섭(71)씨와 고 박광순(2017년 사망)씨의 부인 유현숙(68)씨는 최근 대검찰청에 “국가보안법 피의 사건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을 불기소처분으로 변경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씨는 한겨레에 “경찰에 부당하게 끌려가 폭행을 당한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았는데 함께 고초를 겪었던 친구가 재심을 통해 끝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을 보고 늦게나마 용기를 내게 됐다”고 했다.



이씨와 박씨는 20대 후반이던 1983년 2월16일 친구 정진태(73)씨 집에서 ‘자본론’을 비롯한 공산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서울관악경찰서에 정보과 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됐다. 두 사람은 22일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수사기관의 폭행 등 가혹행위와 진술 강요 속에 반성문과 각서 등을 작성했다. 관악경찰서는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해 북한의 대남 전력 노선에 간접적으로 이롭게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가 인정된다”며 두 사람을 기소유예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고,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은 같은 해 4월 이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기소유예는 혐의는 인정되지만 재판에는 넘기지 않는 처분이다.



군사정부 시절 위법한 수사를 통한 왜곡된 혐의 인정이었지만, 43년이 흐르도록 이들이 혐의를 벗을 길은 요원했다. 기소유예는 검찰 판단인 만큼 법원에 재심 청구가 불가능하다. 기소유예 사실을 안 날로부터 90일, 처분일로부터 1년 이내에만 가능한 헌법소원 청구도 불가능하다. 검찰이 다시 사건을 살펴본 뒤, 과거 판단을 뒤집고 불기소 처분을 하는 ‘직권 재기 후 불기소’ 결정이 이들이 명예를 회복할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두 사람이 뒤늦게나마 혐의를 벗기 위해 검찰에 진정서를 낸 데는 지난해 친구 정진태씨의 재심이 결정적이었다. 1983년 당시 이들에게 ‘자본론’을 보여 준 정씨는 두 사람에 견줘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40여년 만에 재심 기회를 얻었다. 재심 재판에서 법원이 무죄로 판결한 것은 물론,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다. 검찰 스스로 당시 혐의 적용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한 셈이다. 두 사람은 검찰에 낸 진정서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혐의가 있음을 전제로 내려진 기소유예 처분이 유지되는 것은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공동피의자 정진태의 무죄 확정이 이뤄져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이 이뤄진 만큼, 박광순과 이동섭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 또한 검찰의 직권으로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검찰은 여전히 잘못된 처분을 스스로 뒤집는 데 소극적인 분위기다. 다만 지난해 11월, 과거 강제 납북됐다가 유죄 판결을 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납북귀환 어부’ 2명에 대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면서, 당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어부 15명에 대해서도 불기소 결정을 내리는 등 전향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씨와 유씨 법률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검찰이 국가폭력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이들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기소유예자들까지 함께 파악해 직권 재기로 불기소로 변경하는 것을 제도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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