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박은성 진실화해위 조사3과장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미안합니다.”
그가 2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다루는 조사1국에선 조사관들이 조사해온 사건을 진실규명(희생 확인) 의견으로 올려도 상임위원이 전체위원회 사전 단계인 소위원회에조차 상정하지 않는 경우가 적잖았다. 특히 희생자가 군법회의 사형판결을 받거나 과거 경찰 기록에서 낙인이 찍힌 경우는 더욱 그랬다. 조사관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과장인 그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실의 벽을 온전히 뛰어넘기 힘들었다. 그저 상임위원과 국장을 설득해 몇 사건이라도 더 진실규명하려고 했다. 조사관들에게 미안했다.
박은성(55) 조사1국 조사3과장을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조사3과의 ‘소방수’였다. 2021년 5월부터 조사4과에서 충남지역 조사팀장을 맡다가 조사3과로 옮긴 때는 2023년 6월이다. 같은 해 10월 김광동 위원장에 의해 검찰과 경찰이 동원된 내부감사가 시작됐고 3과의 몇몇 조사관들이 집중표적이 되면서 부서가 초토화됐다. 감사가 끝난 뒤 과장이 사직서를 낼 정도였다. 과장 대리를 맡은 데 이어 채용 절차를 거쳐 과장이 된 그는 내부 분위기를 수습하고 어떻게든 조사 기간 내 신청사건을 최대한 진실규명해야 했다.
박은성 과장은 1기에서도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등 한국전쟁기 희생사건을 담당했다. 조사관으로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형무소 사건이었는데, 2기에서는 1기에 견줘 진실규명이 훨씬 미흡해 안타까움이 크다고 했다. 2기에서 조사3과장을 맡기 전 4과에서는 ‘전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충남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등을 조사하거나 조사를 총괄했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주검들을 정리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박은성 과장의 첫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 1997년 대학(동양사 전공)을 졸업하고 들어간 ㅎ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다가 2001년 이스라엘로 떠나 2005년까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분쟁을 공부했다. 현지에서 제2차 이라크 전쟁 발발과 함께 테러와 폭격 등 살벌한 현장을 목격하며 갖게 된 제노사이드에 대한 관심이 이후 진실화해위 합류의 계기가 됐다. 1기 진실화해위 직전에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했다. 1기와 2기 사이 10년 공백기에는 국민권익위원회를 거쳐 납북어부, 집단수용시설 피해자 실태 등을 조사하는 인권의학연구소 부설 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서 일했다.
박은성 과장은 조사관들에게 미안해했지만, 조사관들 역시 박 과장에게 미안해했다. 조사3과에서 일했던 한 조사관은 “박 과장이 상임위원과 조사관 사이 중간에 끼여서 모욕적인 상황을 겪는 등 고생한 것을 잘 안다”고 말했다. 사건 처리에 대한 식견과 따뜻한 성품으로 신망이 두텁다며 존경심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박 과장은 “3기에서 조사관과 중간간부가 서로 덜 미안해하면서 일하려면 담당 상임위원이 누가 오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해 12월12일 강원대 춘천캠퍼스 사회과학대학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5년 과거사 연구자·활동가 대회’에서 박은성 조사3과장이 ‘민간인학살 분야 쟁점과 과제’ 토론 발언을 하고 있다. 임재근 제공 |
― 과장으로서 어떤 캐릭터였나요?
“조사관이 야근하는 만큼 저도 야근하고, 조사관이 주말근무를 하는 만큼 저도 따라서 주말에 나왔어요. 자료수집, 탐문, 보고서 작성 등 각 조사관마다 잘하는 부분이 제각각이거든요. 조사관들의 장단점을 파악해내고, 각자 부족한 걸 보완할 수 있도록 했어요. 제가 조사3과장을 맡은 때가 검찰과 경찰을 동원한 감사로 인해 과가 쑥대밭이 된 직후여서, 억눌려있는 분위기를 수습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조사관들이 조사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싫은 소리 안 하기, 조사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방안을 조언하기, 조사결과보고서에 대해 보충할 점이나 수정할 점을 조언하기, 과장으로서 과 운영 및 조사 결과와 관련해 국장과 상임위원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에 주력했어요. 조사관들이 다들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주어진 시간과 조건 아래에서 최대한 진실규명을 했습니다.”
2024년 11월4일 조사3과가 우수부서로 선정된 날, 조사관들이 박은성 조사3과장의 책상 앞에 이를 축하하는 종이를 붙여놓았다. 진실화해위 조사관 제공 |
― 한국전쟁기 사건은 70년 넘게 지난 데다, 1국을 총괄하는 이옥남 상임위원이 있는 체제에서 진실규명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상임위원과도 갈등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참고인 진술을 진실규명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고, 어떤 자료라도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바꾸기는 힘들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조사관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고 진실규명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족보나 학적부를 열심히 찾았는데, 희생자가 미혼으로 사망했거나 가족들이 함께 사망한 경우, 자녀가 있더라도 가장의 부재 속에서 교육을 못 받았거나 친척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불가능했어요.
자료에 대한 분석과 판단에서도 상임위원이 제시하는 기준을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창원(마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에서의 ‘군법회의 사형 판결’이나, ‘영천 민간인 희생사건’(국민보도연맹 사건 포함)과 관련해 경찰 자료에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10·1 사건 가담 살인’ 등은 맥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했거든요. 형무소 사건의 ‘일시석방’과 ‘탈옥’ 기록에 대한 분석과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10·1 사건’은 1946년 10월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을 뜻한다―기자 주)
‘군법회의 사형 판결’의 경우 조사2국의 인권침해 사건처럼 불법연행과 구금, 재판과정의 불법성을 검토·조사해야 하고, 경찰 자료에 기록된 ‘10·1 사건 가담 살인’의 경우 기록 작성의 목적과 그렇게 기재된 이유를 진술 등을 통해 비교 분석해야 했습니다. 형무소 기록의 ‘일시석방’과 ‘탈옥’도 진짜 석방하고 탈옥한 기록이 아니거든요. 이 밖에도 형무소 사건의 경우 (1950년)9·28 수복 후에 집단학살되고 형무소에서 고문사·병사된 건은 진실규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 조사관들도 많이 속상해했을 텐데요.
“현재 조사1국 상임위원의 지휘 아래서는 소위에 상정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에 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과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한 사람의 조사관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저 상임위원과 국장의 기준에서 한두 발짝 더 나아가서 그들이 진술의 구체성과 신빙성, 진술과 자료 간 또는 진술 간의 불일치를 지적하면, 제가 맥락에 맞게 보류나 중지로 결정할 사건을 진실규명으로 하자고 설득했습니다.
다만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과 경찰 자료의 문제는 제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벽이었어요. 그저 몇몇 사건이라도 더 진실규명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했던 거지요. 어찌 보면 조사관으로서의 소신보다 중간관리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어요.
2기 조사 기간 막바지에는 현 체제에서 진실규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하자고 했고, 보류된 사건, 즉 조사 중지된 사건은 주요 사건 내용과 보류(중지) 사유, 그리고 처리방안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습니다. 3기가 출범하면 빨리 판단해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은 셈이었죠.”
김광동 위원장이 제1소위원회 상임위원을 하던 시절 자문위원들에게 배포한 ’한국전쟁 희생 및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자 조사기준(안)’. |
― (문서를 보여주며) 이건 김광동 위원장이 제1소위원회 상임위원을 하던 시절 자문위원들에게 배포한 ‘한국전쟁 희생 및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자 조사기준(안)'(위 문서)입니다. 이걸 보면 ‘주도적 및 적극적 부역 행위자'를 피해대상 선정과 조사개시 재검토 및 보류대상으로 분류해놓았어요. 결국 2기에서는 이런 기준이 문제가 된 건데요.
“이 희생자 선정 기준은 조사관에게 공람된 내용이 아니에요. 아마도 김광동 상임위원이 국장이나 과장, 그리고 당시 자문위원들에게만 공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 조사팀장이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김광동 상임위원이 이런 희생자 기준을 생각하고 있어 문제라는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어요. 특히 ‘주도적 및 적극적 좌익 활동자(부역 행위자)는 조사개시 재검토 및 보류(기각) 사항’이라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였죠. 실제 김광동 상임위원은 조사개시부터 좌익 활동자와 부역 행위자를 가려내려고 했지만, 진실화해위 기본법(과거사법)에는 조사개시를 기각할 사유가 없으니 조사개시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보류(기각)된 사건들이 이 카테고리에 해당됩니다.
과거사법에 ‘민간인’ 개념은 ‘양민’의 카테고리를 넘어선 개념이에요. ‘양민’은 좌익과 부역 행위를 하지 않는 민간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민간인’ 개념은 어떤 이념을 가졌는지와 어떤 행위를 했는지 따지지 않죠. 연행·구금·재판·희생 과정에서 적법절차를 거쳤는지가 중요합니다. 좌익이라고 해서, 부역했다고 해서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희생시킬 수 없는 거잖아요.
3기에서 희생자 인정기준은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누구나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건 맥락에 따라 광범위하게 정황 증거나 진술의 개연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요. 어찌 보면 1기의 기준을 다시 복구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게다가 3기에는 더 찾을 수 없는 생존 참고인 진술보다도 1기와 2기에서 발굴·확보하지 못한 국정원과 경찰 등 관련 기관의 기록을 확보해야 합니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 3기에서 한국전쟁기 사건의 가장 큰 변수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씀드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에 관한 한 3기에서 상임위원이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상임위원은 조사 지휘에 대한 전적인 권한과 진실규명 조사결과보고서를 소위원회에 상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어 조사방향에서 결과까지 전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떻게 방향을 잡고 진실규명 기준을 세우느냐에 따라 많은 게 바뀔 수 있어요. 2기에서는 초기 2년간 국민의힘 추천을 받은 김광동 상임위원이 조사1국을 총괄하며 틀을 잡고, 나머지 2년간은 위원장으로서 기존에 자신이 세운 틀에 따라 실천을 한 거였죠. 이옥남 상임위원과 국정원 출신 황인수 국장은 그 틀에 따라 실행자 역할을 한 거고요. 3기에서 한국전쟁기 희생사건은 위원장보다 상임위원이 누가 오느냐가 중요합니다.”
― 그렇다면 어떤 분이 조사1국을 총괄하는 상임위원에 임명돼야 할까요?
“진화위 설립에 부정적인 분이나, 민간인을 우익·좌익으로 나누고, 부역 행위를 심사하고 ‘양민’을 가려내려는 냉전적 사고를 가진 분은 상임위원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75년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거나 은폐됐다는 사실에 기반해서 사건의 기록과 진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에 사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은 연구자·전문가·변호사 또는 활동가가 맡는 게 좋겠습니다.”
2023년 7월4일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가 시작되기 직전 이옥남 상임위원(왼쪽)과 김광동 위원장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 과거사법이 현재 안대로 통과되면 3기에서 상임위원은 대통령이 2명(위원장 포함)을 지명하고, 여야가 각각 1명씩을 추천해 선출하게 돼 있어요. 1·2기에서 민주당 추천을 받은 비상임위원들은 어땠나요?
“2기에서 조사1국 사건을 심의하는 제1소위원회 비상임위원들은 인권침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있지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1기에서는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 전문가들이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을 맡았는데 2기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소위와 전체위에 상정되는 수많은 사건보고서를 검토하는 데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요. 전문가가 아닌 데다 다른 직업이 있기도 한 비상임위원들이 2주에 한 번꼴로 사건결과보고서와 안건을 검토하기에 벅찼을 겁니다. 그래도 사건조사결과보고서를 보고 오는 게 옳습니다. 그게 상임이든 비상임이든 위원의 책무니까요. 또한 사건을 제대로 숙지하기 위해선 조사국과도 소통을 원활히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한 편이었어요. 결국 소위와 전체위에서 발언을 거의 못 하거나, 발언에 힘이 실릴 수 없었습니다.”
― 조사관 중에 “이옥남 상임위원은 그래도 보고서는 다 읽고 왔다. 근데 민주당 쪽 비상임위원들은 보고서도 안 읽고 오는 경우가 많아 한심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잖아요. 사실 보고서를 숙지하지 못한 민주당 추천 위원들은 사건결과보고서를 꼼꼼히 읽은 이옥남 상임위원의 발언을 판단할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 상임 및 비상임위원 지명과 추천과 관련해 대통령과 민주당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관해 소위와 전체위에서 토론하고 발언하려면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뿐 아니라 조직 운영 능력과 추진력이 있는 분이 선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적 구성에서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인권침해, 집단수용시설 관련 분들에 대한 적절한 배분이 이루어졌으면 하고요. 2기에서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관련 분야 인사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박은성 진실화해위 조사3과장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
― 근본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70년도 넘은 민간인학살 사건을 조사해야 할까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은 한국사회에 역사적·사회적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앞장서서 좌익 또는 정치적 반대자라는 이유로 낙인을 찍고 불법적인 학살 등 인권침해를 가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월북자 가족, 납북어부, 재일동포 등을 간첩으로 조작했죠. 이는 현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낙인·차별·혐오로 연결되고 있어요. 과거의 좌익이 현재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로 이어지는 형국입니다.
1기 조사 기간 중인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한국전쟁기에나 있을 법한 공권력의 남용이라고 봤어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기 조사 기간에는 현직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에 의한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계엄 하의 불법연행·구금·고문·학살이 한국전쟁 당시와 똑같이 재연될 뻔했어요.
양민과 좌익·부역자를 가르고 이들에 대한 불법을 용인하고, 부수적 피해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아직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민간인 학살을 제대로 조사하고, 진실규명하고, 과거의 불법을 국가가 반성·사과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이상 언제나 반복될 수 있습니다.”
― 3기의 열쇳말은 무엇이 돼야 할지요.
“저는 ‘책임, 반성, 공유’라는 말을 제시하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가해자 문제를 정리해야 합니다. 2기 조사보고서를 보면 보도연맹 사건의 가해 책임자를 해당 지역 경찰서장으로 해놓았는데, 경찰서장을 넘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내무부장관, CIC(방첩대) 등 지휘명령계통에 책임성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한 공포정치를 담당했던 안기부(중정, 국정원)와 방첩사 등 가해 정보기관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책임 부분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기 진실화해위에선 국가폭력 사건의 실체를 밝혔고, 2기 때는 유족들에 대한 국가 배상이 있었어요. 3기에선 그걸 바탕으로 사건의 성격과 가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회적으로 인권침해와 학살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해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