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현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 |
임대차 분쟁을 들여다보면, 계약서에 촘촘히 적힌 문구보다 계약서에 없는 이야기에서 문제가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 각자의 해석 차이까지 더해지면 갈등은 빠르게 확대된다. 당사자들은 분명 계약서를 작성했고 필요한 조건도 빠짐없이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분쟁이 발생하면, 갈등의 핵심은 계약서 바깥에서 오간 말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임대차 계약은 대부분 협의 과정을 거쳐 체결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말이 오가기 마련이다. “나중에 상황을 보고 조정해 드리겠다”, “어려울 때는 배려하겠다”, “장사가 잘되면 서로 윈윈하자”는 식의 표현들이다. 계약서에는 남지 않지만, 당사자들은 이 말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문제는 이 ‘기억의 온도’가 서로 다르게 저장된다는 점이다. 한쪽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표현으로 인식한다. 같은 대화를 나누고도 각자가 기억하는 내용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진다.
이러한 차이는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임대료는 5% 이내에서 협의할 수 있다”라는 문구를 두고도 해석은 엇갈린다. 임대인은 통상적인 범위에서 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반면 임차인은 영업 상황에 따라 인상 여부 자체를 협의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같은 문장을 두고도 한쪽은 ‘인상을 전제로 한 범위’로, 다른 쪽은 ‘인상 여부를 포함한 협의’로 이해하는 것이다.
임대인은 계약서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문서에 없는 내용은 법적 의무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 반면 임차인은 계약 당시 오간 말을 관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계약서에 적히지 않았더라도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기대한다. 이 인식의 차이가 분쟁의 출발점이 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조건부 기대’다. 임차인은 “상황이 좋아지면 조정해 주겠다”라는 말을 약속으로 기억하고, 임대인은 “그때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라는 정도로 이해한다. 같은 말을 두고도 확정된 합의로 받아들이는 쪽과 여지를 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쪽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 실제로 상황이 바뀌는 순간, 이 간극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차인은 “약속을 어겼다”라고 느끼고, 임대인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곧 신뢰의 문제로 번진다.
이 지점에서 계약서는 갈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계약서에 없는 내용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입장과, 계약서에 없어도 약속은 약속이라는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때부터 상대방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실무에서 분쟁이 커지는 경우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계약 당시 오간 말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정도는 서로 알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넘어간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해석의 문제로 바뀐다. 계약서에 적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사소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쟁은 대개 그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반대로 분쟁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도 있다. 계약 과정에서 오간 중요한 내용을 가능한 한 문서로 남기고, 애매한 표현을 줄이는 경우다. 모든 것을 계약서에 담을 수는 없지만,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을 줄이려는 노력이 관계를 안정시킨다. “그 정도는 서로 알고 있다”라는 막연한 믿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임대차 분쟁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복잡한 계약서가 아니다. 계약서에 없는 약속이 어떻게 기억되고 해석되는지를 인식하는 태도다. 말로 남긴 합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고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계약은 문서로 완결되지만, 약속은 기억 속에서 변형된다. 그 변형을 방치하는 순간 약속은 신뢰가 아니라 분쟁의 출발점이 된다. 계약서에 없는 말일수록 더 신중하게 다루고, 필요하다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규현 교수는 건국대학교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이자 부동산·임대차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임차인 보호를 위한 주택임대차 규제에 관한 연구(영국, 미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시 소상공인과 주무관으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주요 저서로는 ‘NEW 상가임대차 분쟁 솔루션’을 포함한 5권의 전문 서적이 있다.
황규현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