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고 안광훈 신부의 장례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정순택 대주교가 사제단이 집전한 미사엔 염수정 추기경도 참석했다. /김한수 기자 |
24일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는 지난 21일 선종(善終)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안광훈 로베르토 신부의 장례 미사가 봉헌됐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주교와 사제단이 집전한 미사엔 염수정 추기경도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김종근 도밍고 신부는 고별사를 하면서 울음이 복받쳐 몇 차례나 말이 끊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고별사는 지난 60년간 한국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로 살아온 안광훈 신부의 삶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부고에서 “양 냄새가 밴 참 목자”라고 표현했지요. 이날 장례 미사에서 배포된 상본(像本)은 깔끔했습니다. 앞면엔 활짝 웃는 안 신부의 사진과 이름, 출생, 수품(受品), 선종 날짜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말씀이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안광훈 신부는 1941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1966년 한국에 와서 60년 동안 한국의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천주교의 한국 선교에는 몇몇 선교회의 역할이 컸습니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外邦)전교회(傳敎會)와 독일의 베네딕도회,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그리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대표적이지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홈페이지에는 한국과의 인연이 소상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916년 아일랜드에서 에드워드 갈빈 주교와 존 블로윅 신부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1918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설립 인가를 받았고요. 처음엔 중국 선교를 목표로 했습니다. 1933년 교황청으로부터 전라남도 선교를 제안 받고 10명의 회원을 파견한 것이 한국과의 첫 인연입니다. 이후 1938년에는 강원도 선교도 맡게 됐습니다. 당시엔 한국인 신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골롬반회는 전라남도와 강원도, 제주도에서 활동하게 됐지요.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선교회이지만 회원들은 미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도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제는 골롬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해 일부는 본국으로 송환하고 아일랜드 출신 회원들은 가택연금해 1945년까지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광복 후 1949년 본국으로 돌아갔던 회원들이 다시 돌아와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모두 38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7명이 선종하고 2명은 포로가 되어 4년 동안 북한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춘천의 소양로성당은 ‘살신성인 성당’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요, 6·25전쟁 당시 이 성당 주임이었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회원인 아일랜드 출신 앤서니 콜리어 신부가 공산군의 총탄을 몸으로 막아 자신은 희생됐지만 신자를 살렸다는 뜻에서 붙은 별칭입니다. 1965년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골롬반 회원 11명이 원주교구에서 활동하게 됐다고 합니다. 1969년에는 150여 명의 골롬반 회원이 한국에서 활동할 정도로 규모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선교회는 전후 복구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물론 한국 사회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사회의 그늘진 곳,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았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천노엘(1932~2025) 신부, 제주도에 성이시돌목장을 만들어 양돈 사업을 비롯해 주민 소득 증대를 도운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1928~2018) 신부 등이 아일랜드 출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은 강인했습니다. 천노엘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인데요. 천 신부님은 1957년 한국에 왔는데 당시 선교회에서는 한국에 보낼 선교사는 특별히 젊고 육체적으로도 강인한 분들을 선발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후(戰後) 한국의 사정이 열악한 것을 감안해 더욱 강인한 선교사를 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교회의 기대처럼 그들은 한국인을 위해 엄청난 추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안광훈 신부 장례미사에서 배포된 상본. 뒷면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구절이 적혀 있다. |
안광훈 신부가 처음 한국에 와서 강원도 원주교구로 발령받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인 안 신부도 아일랜드 출신 못지않은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면서 가는 곳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강원도 정선성당 주임을 맡았을 때에는 높은 이자 때문에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저렴한 진료비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원을 열었습니다. 1980년대 서울대교구로 옮겨 목동성당 주임으로 있을 때에는 안양천 주변에 사는 오갈 데 없는 철거민들에게 성당 건물을 내주었고 이주할 새 터전을 마련하는 것도 도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의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1985~1990년 골롬반회의 한국 지부 초대 신학원장을 맡아 후배 선교사를 양성한 그는 1992년에는 서울 강북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미아6동 돌산동네로 들어가 철거 위기에 몰린 주민들과 동고동락했다고 합니다. 미아 선교본당과 삼양동 선교본당 주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선교본당’이란 사제는 파견되어 있으나 건물을 짓거나 토지를 구입하지 않고 일반 주택을 이용해 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려운 주민들을 돕는 일선 선교 현장입니다. IMF 외환 위기 때는 서울북부실업자사업단 강북지부(훗날 삼양주민연대) 대표를 맡아 실업 문제 해결, 저소득층 자립, 노숙인 자활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제들이 사는 거주 공간인 사제관이 아니라 항상 일반 주택을 전세로 얻어 주민들과 함께 살았지요. 재개발 여파로 그가 살던 집도 여러 차례 철거됐고 그때마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다세대 주택 등에서 살았고, 수십 년 된 점퍼를 입는 등 주민들보다 더 검소하게 살았다고 하지요. 24일 장례 미사 후 고별사에서 김종근 신부가 “다시 만날 때에는 새 옷 입고 깨끗한 모습으로 만나자”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넘어 스스로 한국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2014년 아산상을 받은 이유도 감동적입니다. 상을 받기 3년 전 한국 영주권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다지요.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서류를 검토한 기관에서 “한국에 오래 살았지만 교회 일밖에 한 게 없다. 표창장을 받은 것도 없고”라고 했다네요. 상을 받은 덕분일까요. 그는 2020년 특별 공로로 한국 국적을 얻었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은 ‘제2의 고향’이 아니라 ‘고향 그 자체’”라며 “이방인이 아닌 온전한 한국인으로 살게 돼 자랑스럽다”고 말했지요. 안 신부는 자신이 잠들 곳도 미리 부탁했답니다.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이지요. 배론성지는 행정구역은 충북이지만 원주교구 소속입니다. 한국에 첫 발을 디딘 원주교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안 신부는 특별히 배론 성지에 안장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장례미사 후 안광훈 신부의 유해가 서울 명동대성당을 떠나고 있다. /김한수 기자 |
이날 미사에서 정순택 대주교는 “평생을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본당 교우들에게는 다정한 아버지로, 힘들고 어려운 지역 이웃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가족들에게는 스승으로 함께해 주신 안광훈 로베르토 신부님께서는 이제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우리를 위해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기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칠레 출신으로 현재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는 권세오 곤잘로 신부도 “안 신부님은 평생을 낮은 곳에서 가난한 소외된 이웃의 진정한 친구로 살면서 복음의 기쁨을 몸소 실천하셨다”며 “이토록 훌륭한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견해 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 교회와 함께 하며 이곳에서 선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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